시편
2013.08.18 10:00

(130강) 하나님의 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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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6:1-6http://onlycross.net/videos/psa/psa-126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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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없습니다)

 

 

<본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설교>

 

시126편을 읽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5,6절일 것입니다. 현재의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십상인 이 구절은 분명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감동을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의미와도 같기 때문에 날마다 수고와 고생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 현실이 이 말씀처럼 그대로 이뤄지는가 입니다. 과연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이 세상 현실일까요?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고 이치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구조는 아무리 노력해도 없는 자는 여전히 없는 자로 남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고와 고생은 있으나 기쁨의 결실은 없는 것이 이 사회의 구조이며 현실인 것입니다.

 

 

물론 고생한 것만큼 그 결과를 얻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컷 고생 했으면서도 실패하고 결실이 전혀 없는 결과를 맞이할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거둔다는 것이 고정된 법칙으로 작용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5,6절의 말씀은 ‘고생 끝에 낙이 올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는 내용을 보면 이 시편의 배경이 유다의 포로 시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꿈꾸는 것 같았다’는 표현이나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2절)는 구절은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기쁨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시고 돌려보내시는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곡식단을 거두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유다 백성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이 마치 고생 끝에 낙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포로 생활이라는 눈물의 시절을 참고 견딤으로써 해방이라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로 생활이 끝났다는 것은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을 때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된 그 날은 온 국민이 기뻐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해방의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된 것은 아닙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빈곤의 삶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돌아오게 된 기쁨은 있었지만 그들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의 상황은 더 이상 기뻐할 수 없게 하였을 것입니다. 완전히 무너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도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2절에서 말하는 웃음과 찬양의 의미가 단지 포로에서 돌아온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 뭇 나라들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유다의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신 것으로 비춰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일로만 국한한다면 포로 되게 하신 일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포로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다를 포로 되게 하시고, 다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이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유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역시 시편 저자처럼 웃고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는 하나님의 큰 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무엇일까요?

 

 

렘 33: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크고 은밀한 일은 33:10절을 보면 황폐한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감사하는 소리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황폐한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가 있게 된다면 그것은 환경과는 무관합니다. 환경을 초월해서 환경과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크신 일을 알게 됨으로 맺어지는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이처럼 환경과 무관하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렘 33:8절의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의 죄사하심입니다.

 

 

유다는 죄 사함의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죄를 선포하는 선지자를 배척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죄를 몰랐기 때문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를 망하게 하시고 포로라는 비참한 자리에까지 밀어 넣으심으로 죽음이라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곧 자신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사형수가 아닌 사람에게는 ‘죄를 사한다’는 말이 자신과 상관없는 말로 들리지만 사형수에게는 무한한 기쁨의 소리로 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큰 일은 자기 백성을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롭게 고쳐 가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온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일에 담겨 있는 진정한 크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하나님의 크신 일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는 주어진 환경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알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의 환경이 비록 눈물을 흘리는 고통과 어려움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그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시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5,6절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왜 울며 씨를 뿌리느냐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기대하고 뿌리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유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것도 예전의 포로 생활을 생각하면 눈물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그렇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통과 어려움의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은 무너진 예루살렘에서 씨를 뿌리면서 포로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물은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통의 눈물과 함께 하나님의 죄 사함이라는 자비하심을 봄으로써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기쁨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한 죄 사람의 기쁨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절)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죽음을 보게 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를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일이라면 말씀드린 대로 현재의 환경을 가지고 인생을 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무너지고 황폐화 된 예루살렘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환경은 비참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자신들을 기쁨과 즐거움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알게 되는 것이 기쁨이며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4절의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라는 말씀에서 남방은 사막, 광야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남방 시내는 사막에서 시내가 흐른다는 뜻인데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와로만 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세계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세계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의 무엇으로도 가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일이 행해지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세상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세계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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