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9.08 09:59

(133강) 여호와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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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9:1-8http://onlycross.net/videos/psa/psa-129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설교>

 

신앙과 삶이 하나 되어 있다고 할 때 대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적 모습들이 실천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신앙적 삶에 해당된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신앙과 삶이 하나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리새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입니까? 거기에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헌금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까?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면 신앙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의 힘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것이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신앙의 모습일까요? 성경은 신앙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 46: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만히 있어도 이방인의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심으로 전쟁을 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높임을 받고자 하십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쉬게 하셨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하건 하지 않건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앙은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주일 성수를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 같은 자를 붙드시고 진리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삶과 일치되어 나타난다면 과연 그 삶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묵상해야 할 중심 내용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129편은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의 말씀 역시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으로 인한 고통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는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3절)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등을 갈아 고랑을 길게 지었다는 것은 아마 등에 채찍 맞은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등에 채찍을 맞으면 살이 패이면서 채찍 자국이 길게 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에 채찍을 맞는 일이 주로 노예에게 해당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이 노예가 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29편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회상하거나 또는 바벨론에 포로 되어 노예로 생활했을 때를 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셔서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의 정성과 열심입니다.

 

 

즉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면 하나님이 그 간구를 들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개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신앙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 체계에는 하나님의 도우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성과 열심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간의 정성과 열심을 근거로 해서 도울 자를 도우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에는 인간의 정성과 열심히 개입될 수 없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정성과 열심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과 삶의 하나 됨을 인간의 정성과 열심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은 4,5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악인들의 줄을 끊으시고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자들을 물러가게 하신 근거를 여호와의 의로우심에 두고 있습니다. 악인의 줄을 끊으시고 물러가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적 행동이나 열심과 상관없이 여호와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운 형편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건짐을 받았다면 자신들을 도와주신 하나님을 의로우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면 애당초 어려운 형편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셨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더 빛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의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4절의 내용을 좀 더 주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악인을 심판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의 줄을 끊으시고 수치를 당하여 물러가게 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고통을 겪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악인을 심판하여 멸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줄을 끊고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으로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를 알고 하나님의 의를 찬송하는 시편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또한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인의 줄은 이스라엘의 자유를 박탈하고 악인이 의도한 대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줄을 끊으셨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악인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죄에 붙들려 고통 가운데서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기 백성을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 저자가 말하는 여호와의 의입니다. 악한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가 수치를 당하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시온에 거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아래 있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시온을 굴복시키고 억압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지붕의 풀과 같은 존재여서 자라기 전에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앞에서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의를 믿고 신뢰하는 신자는 땅의 것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자신을 악인의 권세로부터 건지시고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같은 은총의 세계로 인도받은 것을 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족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에 처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복이 있다거나 축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에서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의를 아는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여호와께서 베푸신 복의 세계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과 삶의 하나 된 모습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삶이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그 다양함은 우리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를 골탕 먹이고 고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의를 알고 신뢰하는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불의가 없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신뢰에서 삶의 참된 안식과 평강을 배우며 누려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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