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1.13 10:08

(102강) 자기를 위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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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8: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98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3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4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5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6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7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8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9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설교>

 

오늘 읽은 시편 98편의 주제를 정한다면 ‘하나님을 찬송하라’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시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진술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찬송은 무슨 뜻일까요? 찬송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높이는 것이 찬송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 행위를 높인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다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보면 찬송을 많이 부릅니다.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더 찬송을 잘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찬송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하기도 하고 박수를 치고 두 손을 들고 흔들면서 거의 무의식적인 상태에 빠져 부르기도 하지만 심각한 것은 거의 모두가 자기감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생각도 없이 단지 찬송을 즐기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은 찬송을 부르는 사람의 심리와 감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물론 찬송을 잘 부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심리와 감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찬송을 잘 부르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노래 전공자들로 조직된 성가대가 제 아무리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찬송을 불렀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일단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은 오직 새 노래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노래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노래하는 것이고, 기이한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로써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베푸신 구원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절에는 한 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즉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어긋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를 위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자기를 위한 구원이라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를 천국 보내는 것에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만약 우리를 천국 보내는 것이 기이한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고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인간, 즉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른 단추도 잘못 끼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첫 시작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모든 것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착각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의 일부터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면 처음부터 사탄의 존재를 멸하시는 것이 마땅하고, 설사 사탄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을 지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방치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간을 위해 구원하겠다고 하시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구원을 베푸셨다는 말이 바로 이 같은 하나님 되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이한 일은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기이한 일에 대한 반응은 찬송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무엇을 위해 구원을 행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하나님의 기이한 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에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한 구원입니다.

 

 

3,4절을 보면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자와 성실을 베푸신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인자와 성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사건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고,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일에 놀라고 감사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따라서 새 노래는 십자가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본 신자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즐겁게 노래하고 찬송하라는 것은 신자의 안식은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안식을 세상의 것에서 누리려고 합니다. 많은 소유가 힘이 되고 그 힘이 안식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안식이 될 수 없음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그 인자와 성실하심에 자신을 맡길 수가 있다면 그것이 안식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자로 살지만 이 세상에서 안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심판이 세상의 결국입니다. 세상은 불의하며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신 방식으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며 약속을 이루신 성실하심입니다. 심판을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면 늘 같은 생활이고 즐거움과도 거리가 멀게 느껴지겠지만 기이한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게 되면 우리의 존재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영광이기 때문에 이것을 위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신자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도구로 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길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믿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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