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2.10 10:08

(106강) 빈궁한 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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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2:1-28http://onlycross.net/videos/psa/psa-102012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15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2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23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설교>

 

시 102편은 자기 고통을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28절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고백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쉽게 예상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통으로 인한 탄원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도 응답으로 고통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02편을 보면 탄원과 찬양은 있지만 탄원에서 찬양으로 이어지기 위한 중간단계, 즉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부분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102편이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102편 저자의 당시 상황이 힘든 고통을 겪고 있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힘든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고통의 상황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2편에서는 그 부분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2편을 보면 탄원의 기도는 1-11절까지고 12-28절까지가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는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자신의 처지를 기울어지는 그림자와 시드는 풀에 비유함으로써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고통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여호와를 높이는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의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시편 저자는 고통에 처한 자신의 탄원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높이는 찬송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고통의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저자가 탄원의 기도를 하자마자 하나님에 의해서 고통의 삶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는데, 그런 식으로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고 멸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 응답을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기도응답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도한 내용대로 이뤄주시는 것입니다. 백만 원을 달라고 기도했으면 백만 원이 자기 손에 들어오는 것을 기도응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이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셨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고통의 처한 저자의 처지가 기도를 함으로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고통의 현실이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행한 사람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부와 영광을 누리는 환경에 있다고 해서 자기 인생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믿음의 길을 간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에 대해 말하기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외적 조건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짐작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외적 조건이 좋으니 행복할 것이고 외적 조건이 나쁘니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경험하신 행복과 불행이 그처럼 외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습니까?

 

 

외적 조건에 의한 행복과 불행은 잠시 동안의 느낌일 뿐이지 우리를 행복의 길로 계속 인도하는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102편의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먼저 염두에 두셔야 하는 것은 저자의 기도 제목이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도 제목이었다면 찬송은 고통의 삶에서 벗어난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3-5절을 보면 저자의 처지가 거의 죽음 일보직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음식 먹기도 잊었다고 한 것을 보면 고통으로 인해 금식기도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7절에서 지붕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밤을 새웠다고 한 것을 보면 밤을 새운 기도, 즉 철야기도까지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저자의 기도는 자신의 고통으로 인한 기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10절에서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즉 저자는 자신이 처한 고통의 현실을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은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 같은 고통의 현실로 던져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고통의 현실을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고통에 대한 시각이 달라집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을 죄로 인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의 삶에서 깨닫게 된 차원이 다른 신앙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고통에 처하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생각 없이 고통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와 분노로 자신을 고통에 던져 넣으신 것으로 여긴다면 그 생각은 자신의 죄 문제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시편 저자의 탄원의 기도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탄원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주의 진노와 분노가 당연함을 받아들이는 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의 기도는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현실은 그대로일지라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써 찬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감사와 기쁨, 찬양은 사실 외적인 삶의 조건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그 분량을 계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주어진 삶의 외적 조건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풍요를 하나님의 사랑, 은혜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가 자신의 고통을 주의 진노와 분노로 여김으로 인해서 바라보게 된 것은 1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에 초점을 둡니다. 결국 저자는 현재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17절에서 말하는 빈궁한 자의 기도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내 놓을 것이 없고 다만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그 심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내 놓을 것이 없는 빈궁한 자의 기도, 하나님은 이 기도를 결코 멸시하지 않습니다.

 

 

빈궁한 자의 탄식의 기도에 하나님은 주의긍휼을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비록 삶은 고통의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배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입니다. 즉 하나님의 최고의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해결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2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현실에서라도 항상 안전히 거주한다, 주 앞에 굳게 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주의 긍휼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심으로 어떤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고 감사와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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