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3.31 09:57

(113강) 저주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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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9:1-16http://onlycross.net/videos/psa/psa-10901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설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제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세우신 규례입니다(레 19:18). 그런데 본문을 보면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게 합니다.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용서하게 해 달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성경에 어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신자에게 어울리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울리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의 정신이 바로 이런 것이고, 실천의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성경이라면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일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같은 저주의 기도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109편을 쓴 저자는 다윗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면서 죽이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다윗이 누군가에 대해 저주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 같은 저주의 기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먼저 1절을 보면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잠잠하지 마옵소서라는 말은 다윗의 원수에 대해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당연한 일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문제는 다윗의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4,5절을 보면 다윗의 원수는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고, 다윗의 사랑을 미움으로 갚으며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과연 이들이 누구일까요? 악으로 선을 갚고 미워함으로 사랑을 갚았다는 말에서 생각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악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고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수님의 선과 사랑에 대해 악과 미움으로 갚았을 뿐입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렇게 보면 109편은 다윗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하여 우리가 선과 사랑에 대해 악으로 갚은 예수님의 원수들이며 그런 우리에게 마땅한 것이 저주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원수에 대한 다윗의 저주의 기도는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한 우리들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6절의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라는 기도에서도 드러납니다. 다윗의 선과 사랑에 악으로 갚는 것이 악인, 즉 사탄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지금도 사탄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7절의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라는 내용처럼 죄인으로 정죄되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의 기도까지도 죄로 간주될 뿐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저주의 내용을 보면 선과 사랑에 대해 악으로 갚은 대적자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비참한 처지가 다윗의 대적자들에게는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저주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며 복을 원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마땅한 것은 저주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다윗이 말한 비참한 저주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선과 사랑에 대해 악과 미움으로 갚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갚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예수님의 선에 대해 선으로 갚은 적이 있습니까? 우린 늘 내 중심에서 나를 위해 살았을 뿐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나의 구원을 위해 이용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바로 여호와께 저주의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한 예수님의 대적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복이 아니라 저주가 마땅한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채 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니 그 기도 또한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저주의 보응이 마땅한 것이 우리의 실상임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다윗의 기도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21,22절에 보면 다윗은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중심이 상했다는 것은 상한 심령을 뜻합니다. 상한 심령은 죄를 알고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으며 주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심령을 말합니다. 이처럼 상한 심령이 되면 자신을 건지는 것을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 어떤 것도 저주 아래 있는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힘과 위로도 되지 못하며 다만 주의 인자와 선하심만이 나를 저주에서 건질 수 있는 도움이라는 것을 알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23-25절에서 다윗은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 같은 다윗의 모습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라면 예수님을 좇는 신자 또한 세상의 영광이나 힘을 위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신자의 길이 세상의 영광이나 힘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에서 위로를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진정한 복의 세계에 대해서 무지하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으로 인한 참된 즐거움 또한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에서도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27절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주가 마땅한 우리는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잘되고 못되었다는 것으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자랑할 문제는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저주 아래 있는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은 소유의 번성이나 세상의 영광 때문이 아니라 31절의 말씀처럼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대적하고 저주가 당연한 나 같은 자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총의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의 인자와 선하심이 나를 건졌음을 고백하며 이웃에 대해서도 주님의 인자와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주에 갇힌 우리를 건진 것이 주의 인자와 선하심이기에 우리는 어떤 일에서도 주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든든한 믿음에 있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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