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4.14 09:35

(115강) 그의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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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1:1-10http://onlycross.net/videos/psa/psa-111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3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4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7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8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9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설교>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체험이란 눈으로 목격하고 실제 몸으로 경험한 특별한 사건을 의미할 것입니다. 가령 안수하여 병이 낫는 일이나 기도하여 금이빨이 나오는 것과 같은 현상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같은 현상을 기적이라고 하며, 그 기적을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증거로 여기면서 그러한 현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체험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평범하다고 여기는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교제하고 대화를 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만남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만남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있게 하고, 따라서 그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만남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난 증거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체험을 하나님을 만난 증거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체험을 해도 체험을 가지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는 하나님은 기껏해야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님’수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인도 생각하는 신의 수준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뜻을 가지고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를 낱낱이 계시해주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111편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이 증거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으로 우리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앎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할렐루야’즉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할렐루야로 시작 할 때 이어지는 것은 찬양할 수밖에 없는 여호와의 일입니다. 본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2절)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신 일이 있음을 언급하고 그 일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은 신자의 모임, 즉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직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정직한 자들의 모임, 즉 교회와 함께 누린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11편의 저자가 누리고 있는 감사와 찬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들이 바로 정직한 자들의 모임이 되는 것이고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편 저자가 증거하는 여호와의 크신 행하심으로 인한 감사와 찬양이 있는 것이 정직한 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해서 신자 된 증거라고 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라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알아야 하고 그 일로 인해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편 저자의 감사와 찬양에 참여하고 함께 누리는 정직한 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기적이라고 하며, 그 기적이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행해진 일로 말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여호와의 일이 그의 언약으로 인해서 행해진 일이고 그 일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즉 배부름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일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9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백성을 속량하신 일이 여호와께서 은혜와 자비로 행하신 크신 일이고 기적이며, 이 일이 속량 받은 백성들에게는 배부름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자기 백성을 속량하시는 구원자로 만나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 역시 시편 저자가 만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시편 저자가 경험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참으로 크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는 저주를 담당하게 함으로 백성을 구원하는 그 같은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게 되면 3절의 내용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를 영원히 세우셨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놓고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 되었다면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결국 구원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언약대로 나를 구원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도 구원이 최소 되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고함이고 이것이 바로 지금도 우리에게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일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적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자비로 행하지는 기적이며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분임을 알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에만 눈을 두려고 합니다. 무엇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만큼 약하다는 뜻입니다. 늘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좇아가는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좇는 사람은 보이는 것에서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물이 있어야 감사하게 되고 찬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가능합니다.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때 신자는 자신의 삶의 전부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무관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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