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10.20 09:34

(95강) 애굽으로 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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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42:18-22http://onlycross.net/videos/jer/jer-42182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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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여움과 분을 예루살렘 주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를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 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

19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20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 너희에게 전하였어도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2 너희가 가서 머물려고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

 

<설교>


요하난과 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피신하는 도중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19절). 무슨 의미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애굽은 이방 나라니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것도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단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10절에 보면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다에 남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눌러 살아야 할 땅은 이미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 눌러 앉아 사는 것은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이 애굽으로 가고자 한 것은 바벨론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1절에서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다가 망하기 전이라면 이 말씀은 당연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멸망한 후라면 다릅니다.

 

 

유다는 멸망의 위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우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으로 신뢰하였을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셨다면 유다는 멸망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생각이고 유다 백성의 생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그들이 처한 현실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신뢰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계속되면 하나님의 존재와 살아계심에 대해 회의감이 들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한 대로 문제가 해결되며 일이 이루어진다면 누구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이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멸망의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매우 주관적인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나만 잘하면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고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염려와 근심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고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삶보다는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게 하는 삶의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유다의 멸망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단지 죄에 대한 심판으로만 이해한다면 멸망 후의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유다의 멸망이 죄에 대한 심판이라면 그러한 유다에게 함께 하시고 도우시겠다는 말씀은 유다의 회개 이후에 언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범죄-심판-회개-축복’이라는 도식과도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멸망 전의 유다의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복을 주시고 도우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근거를 유다라는 민족성에 두었고 율법을 행하는 자기 행함에 두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멸망으로 이끄신 것은 그들이 의미를 두고 붙들고 있던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은 유다가 회개를 했기 때문에 다시 도우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한다면 멸망하기 전의 유다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참된 믿음에 붙들어 놓기 위해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에 있음을 아는 자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멸망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이며 뜻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을 축복과 구원의 근거로 삼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시고 잘되게 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이 아니라 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생각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어려운 일이 있게 하시고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느낌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돕고 지키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아야 복 받는다’는 것은 자기 주관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은혜가 길어들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공로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자기 잘됨을 자기 신앙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삶에 늘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뻐할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것도 내가 잘해서 받는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타인보다 좋은 것, 많은 것을 누린다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으로 ‘내가 잘해서 복 받았다’는 교만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생각을 경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고 말합니다.

 

 

유다 땅은 황폐화되었고 여기저기 전쟁 후유증만 가득합니다. 하지만 애굽은 평화롭고 양식이 풍부합니다. 현실만 생각하면 유다 땅에 눌러 앉는 것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는 현실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참된 현실을 바라볼 것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현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유다를 도우셨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곧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주신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하나님을 세상의 시각이 아니라 생명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애굽으로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하지 않으신 적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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