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11.24 10:15

(99강) 하나님의 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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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45:1-5http://onlycross.net/videos/jer/jer-4501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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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4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바룩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였는데 그렇게 보면 바룩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남기는 일로 하나님께 봉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봉사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봉사와 복을 구분하는 것이고 봉사를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봉사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복을 받는 자신만 생각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말을 마치 하나님이 약속한 진리인 것처럼 간주합니다.

 

 

봉사와 복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과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봉사와 복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것이 곧 복의 세계에 참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사했기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고 복에 거하기 때문에 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봉사한 것을 빌미로 그 어떤 기대나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고 설사 더 힘든 형편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불러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록했던 바룩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시고 자신은 자기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룩은 예전에 고통과 슬픔으로 괴로워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룩은 이미 36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한 바룩도 고통과 슬픔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룩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유다의 멸망과 함께 겪는 고통과 슬픔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바룩이라고 해도 고통과 슬픔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 예레미야도 동일합니다. 바룩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예레미야도 유다의 고통을 동일하게 겪으며 말씀을 외쳐야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요하난에 의해 애굽으로 가게 하십니다.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피신한 그 곳에서도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기록하는 일로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해서 인생이 나아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지 한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하면 복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헛된 기대일 뿐이고 결국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기 열심에 대한 회의로 나아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 말씀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했던 모든 사람들이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물론이고 신약의 사도들 중 누구 하나도 하나님께 봉사한 것 때문에 복을 받아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다고 증거 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 가장 많은 수고를 한 사도로 인정되는 사도 바울도 그로 인해 세상적 보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누리던 혜택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고 복음으로 인해 온갖 고난을 받았습니다. 말도 어눌했고, 몸에는 평생 가시가 있었고, 고난을 받는데도 하나님이 고난에서 건져주지 않으신 것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는 의심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우리 기준에 의한다면 사도의 어눌한 말을 고치시고, 몸의 가시도 제거하시고, 고난에서 건져주시면서 누가 봐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도로 인정할 수 있는 조건을 주시고 사도로 일하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사도의 말을 믿고 사도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증거에 의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기적으로 인해 몰려든 무리들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무리가 몰려들어도 그들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하고자 했을 뿐이지 믿음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통과 슬픔으로 탄식하며 평안이 없다고 한 바룩에게 하나님은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라고 하신 것을 보면 바룩은 유다의 고통과 슬픔을 보면서 유다를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바룩의 뜻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세운 것을 헐고 심은 것을 뽑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고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우시고 심으셨으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허시고 뽑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존재이지 자신의 뜻을 내어 놓으며 이루어 달라고 요구할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셨으나 헐어버리시고, 심으셨으나 뽑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헐어버리시고 뽑으시겠다는 것이 뜻이 아니라 헐어지고 뽑혀지고 다시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아는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에 의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요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지만 믿음은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엇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큰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큰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과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바라봐야 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만 바라보며 높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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