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4.01.26 10:38

(107강) 던져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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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51:59-64http://onlycross.net/videos/jer/jer-51596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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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9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

60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

 

<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기독교인조차도 심판보다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아름답게 만드시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하나님다우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다면 일찌감치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유대 민족의 행위로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행위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 민족의 속성이 곧 인간의 부패한 속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유다가 아니라 미국, 대한민국, 그 어느 나라에 오셨다고 해도 결과는 동일합니다.

 

 

신자는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고 판단하시는지, 무엇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시는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의하고 심지어 나 또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한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이방 나라와 함께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바벨론의 멸망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과 충돌한 바리새인을 나쁘게 여긴 것처럼 유다를 괴롭히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한 바벨론이기 때문에 심판이 당연하다는 선입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특별히 악한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의 부요는 세상 기준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누구든 바벨론처럼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이 심판의 대상이라면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것처럼 본다면 왜 세상을 우리의 존재 기반으로 삼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59절에 보면 시드기야 왕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 스라야라는 사람이 같이 갑니다. 스라야는 병참감인데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시종장으로 말합니다. 이 스라야가 시드기야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대해 예언한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고 그 책을 스라야에게 줍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가면 그 모든 말씀을 읽고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62절)고 말합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면서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64절)고 말하라고 합니다. 책에 돌을 매어 던지라는 것은 책이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은 책에 기록된 말씀처럼 반드시 몰락하고 책이 떠오를 수 없는 것처럼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못하며 영원히 강에 가라앉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예레미야의 말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희망일까요 절망일까요. 희망입니다. 비로 현재는 포로가 되어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만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유다는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신자가 세상에서 힘든 삶을 산다고 해도 모든 삶이 언젠가는 끝을 맺고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세상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희망입니다. 말씀하시고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 희망이며 전부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야곱의 분깃은 그와 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이스라엘은 그의 소유인 지파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고 말합니다.

 

 

야곱의 분깃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바벨론의 무너짐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의 운명은 강에 던져진 책으로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유다에게는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유다와 다른 나라를 차별하여 대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바벨론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의 방식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스라엘도 이방 나라와 동일하게 악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언약 밖에 있는 이방 나라는 그들의 악함에 따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언약의 방식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 관계 밖에서는 유다도 이방 나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유다 백성이라고 해도 유다가 아니며 오직 언약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참된 유다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재물을 생존의 기반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재물에도 한계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러한 재물을 복으로 간주하고 재물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은 언약 밖에 있는 이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자는 재물과 상관없이 복된 존재입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될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나은 복은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어느 한 부분도 천국에 어울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게 된 것이 복이며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이고 그 언약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대로 우리의 악함을 우리에게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대신 갚으심으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이 긍휼과 사랑을 아는 자가 언약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참된 이스라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들을 무너지게 하시고 포로 되게 하시며 70년 동안 고통의 세월을 지내게 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는 자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주어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근거로 복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을 근거로 한 종교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형편에 있든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실 세상과는 다르게 대하십니다. 때로는 무너지게도 하시고 고통에 집어넣기도 하시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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