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4.02.02 10:46

(108강) 마지막 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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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52:1-11http://onlycross.net/videos/jer/jer-52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2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심이 그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4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5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6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7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그 성에서 나가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들이 아라바 길로 가더니

8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9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

10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설교>

 

예레미야서는 유다가 무너지는 과정과 그 형편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1-11절은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을 배반함으로 인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시드기야 왕을 사로잡고 그의 눈앞에서 아들들과 고관들을 죽이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12-23절은 바벨론 군대의 사령관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며 성전의 기구들도 약탈당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4-30절까지는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의 수를 말하고, 31-34절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이 바벨론의 옥에서 37년 만에 풀려나와 남은 평생 동안은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예레미야서의 마지막이 왜 유다의 멸망을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가 무너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39장에서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 다시 유다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서가 끝을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이방 나라를 다르게 대우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는 멸망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유다에게는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신다는 회복이 약속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서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유다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에 대한 내용으로 끝나는 것이 더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너짐은 절망이고 회복은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절망에 가두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희망이 있는 자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말씀하시고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희망이 되는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때문에 예레미야서의 마지막은 유다의 무너짐보다 회복에 대한 말씀이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용만 본다면 52장은 어둠과 절망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성취하실 것을 믿는 믿음의 시각에서 본다면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은 무엇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바탕을 자기 열심에 둡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신앙이 좋은 것이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신앙이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신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중심에 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의 예수님 말씀처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마지막은 유다의 철저한 무너짐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유다 스스로는 도무지 일어설 수 없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서 유다가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되고 다시 성전에서 제사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다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즉 신앙의 바탕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52장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말에는 여호와가 악을 여기시는 것을 사람들은 악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악이 아니라 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절 끝에 보면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드기야가 애굽과 화친을 맺은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바벨론은 이 일을 빌미로 해서 유다를 치게 됩니다. 시드기야는 애굽과 화친을 맺은 것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으로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다를 위해 유리한 선택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유다에게 함께 하시고 친히 왕이 되셔서 유다를 다스리고 계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힘을 두려워했고 애굽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의 유익만을 좇게 되면 시드기야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을 간파할 수 없게 됩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을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 때문에 말씀도 제 멋대로 해석하게 되고, 결국 현실에서 유익이 되는 결론만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말씀과 선악과 사이에서 갈등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말씀은 잊고 하나님 같이 된다는 자기 유익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이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선악 기준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악으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것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사사 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과 화친을 맺은 것은 유다는 물론이고 바벨론과 온 세상이 여호와의 손에 붙들려 주관되고 있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를 자신의 생각대로 지키기 위해 애굽을 택한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역할은 자신의 지도력과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부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왕이 되심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이러한 왕의 역할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참된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는 모든 초점을 예수님에게 두고서 신앙을 예수님에게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예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나의 방식은 무너지고 예수님이 행하심으로 그 복이 내게 이뤄진다는 예수님의 방식에 기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건 그것을 내세우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위에 유다를 세우시기 위해 예레미야서를 절망으로 가득한 내용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 안에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에 대해서는 절망을 보게 되고, 절망에 처한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희망을 봐야 합니다.

 

 

유다의 무너짐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착각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무너지는 길로 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헛된 꿈을 이뤄주기 위해 존재하시지 않음을 알게 하시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는 인간됨을 위해 절망의 자리까지 내려가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 우리의 잘못된 생각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되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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