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2.09 10:23

(1강) 선지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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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1:1-8http://onlycross.net/videos/lam/lam-01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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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설교>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애가는 사람이 많던 예루살렘이 적막하게 된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이 적막하게 된 것은 3절의 내용처럼 유다의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갔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멸망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당연한 결과로 여기며 자기 갈 길로 가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유다의 멸망으로 슬퍼할 뿐입니다.

 

 

유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는 유다의 현실은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삶의 질과 환경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의 일을 도우시고 잘되게 하시며 형통의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유다의 번성이 아니라 멸망에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신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다의 현실을 보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로 인해 그 처지가 초라해졌을 때 ‘하나님을 믿는데 왜 그렇게 밖에 못사느냐’라고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의미를 모른다면 세상의 조롱이 있을 때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하는 것은 유다가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예레미야도 유다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같은 민족의 고통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유다가 겪는 고통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고통의 내막을 모두 아는 선지자로 유다를 바라볼 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유다의 무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이 성소를 침범하여 모든 보물을 약탈합니다. 성소는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거룩한 곳입니다. 유대 백성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성소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성소가 이방인에 의해 침범되고 성소의 보물까지 약탈됨으로써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소는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한 성소가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배우고 알 수 있는 곳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에게는 이것이 애가를 부르게 하는 슬픔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현대인들의 슬픔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문제, 생존의 문제로 인해 슬퍼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은혜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항상 세상의 것을 기쁨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겠습니까? 기독교인조차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용서와 긍휼을 말한다고 해도 정작 속마음은 세상의 부요를 누리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문제는 욕망에 붙들려 있는 자신에 대해 무덤덤하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자신을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슬픔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에서 멀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삶이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돈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당장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애가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애가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자 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를 소원하는 신자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문제에 마음이 앞섬으로 인해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의 은혜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슬퍼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애가를 부르는 선지자의 마음과 일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자신이 진정한 신자 됨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자라고 하지만 형식만 남아있을 뿐 진정성은 사라진 채 오로지 나를 위해 신을 찾고 나의 기대와 뜻을 가지고 신을 부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그러한 현실이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사정을 앞세우며 나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하나님을 원망할 뿐입니다. 결국 애가는 하나님께 마음을 둔 신자의 슬픔이고 그러한 슬픔이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사정을 살피고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돈은 인생을 화려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자기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인생의 끝을 생각한다면 돈이 만들어 준 화려한 인생도 허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의 가치와 존귀함은 인생의 끝을 생각하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비록 유다가 망하고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유다가 잊고 있는 용서와 자비의 세계가 이방인이 누리는 부요에 비할 바 없는 복의 세계임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희망과 위로와 힘은 무엇일까요? 바벨론이 망하고 해방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불변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현실이 유다에게는 항상 위로며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이 희망과 위로를 놓친다면 그것은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만을 전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홍해 기적이나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경험한 모든 기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단 하나의 기적만으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홍해 사건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했다면 그 믿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결국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적 자체를 즐기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의 현실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슬픔입니까? 마음껏 부를 누리지 못한 것 때문입니까? 삶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입니까? 이러한 슬픔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삶에 불만을 가지는 것이 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로 이루신 복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인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슬픔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복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살아있는 신자 됨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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