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2.16 09:57

(2강) 선지자의 고통

조회 수 307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애 1:18-22http://onlycross.net/videos/lam/lam-0118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설교>

 

예레미야는 유다의 고통 안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유다가 겪는 고통으로 인한 슬픔이 아니라 유다의 고통에서 죄를 바라보며 그들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며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에서라면 ‘하나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라는 원망과 불평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유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18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합니다. 유다를 폐허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에는 불의함이 없고 하나님의 정당한 행하심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를 폐허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선지자는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유다 백성입니다.

 

 

선지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누가 봐도 유다 백성의 고통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고 하고, 그로 인해 고통에 있게 된 것으로 말합니다.

 

 

20절에서도 선지자는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선지자의 입장에 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죄가 있다고 해도 그 죄를 타인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은 죄로부터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인데 선지자는 유다의 잘못을 책망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자신의 죄로 짊어집니다. 환난을 당하고 애를 다 태우고 마음이 상한 것 모두가 하나님의 반역한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이러한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눈물 또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유다가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면 선지자로서는 자기 살길을 찾아 가면 됩니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유다는 유다고 자신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유다는 폐허가 된 상황입니다. 그 상황을 뒤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살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선지자는 여전히 자신의 할 일이 있음을 알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의 반역을 자신의 반역으로 짊어지고, 유다의 고통을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로 여기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가의 내용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입장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슬퍼하고 탄식해야 할 사람은 예레미야가 아니라 유다 백성입니다. 그런데 탄식하고 울어야 할 사람은 울지 않고 선지자가 자신의 죄로 간주하고 슬퍼하고 울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유다 백성은 선지자의 탄식에 함께 하지 않은 것이고 그들의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를 보라고 합니다. 선지자의 고통은 유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들임으로 인한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유다의 죄에서 자신의 죄를 보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관계에 있다고 해도 타인의 고통에서 자신의 죄를 보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고통이 없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21절에서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레미야의 탄식과 고통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타인의 죄를 보는 일에는 민감하지만 자신의 죄를 보는 일에는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눅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은 평화로웠습니다. 예레미야 때처럼 폐허가 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십 여년 후에 로마에 의해 함락이 되지만 예수님을 그것을 미리 보고 우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예루살렘의 죄를 짊어지는 길입니다. 사실은 예루살렘의 죄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로 인한 저주를 받으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수님의 울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기 죄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활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의 죄 용서와 구원의 의미로만 바라봅니다.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예수님의 고난과 탄식에 함께 하지 않으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으로 마치 예수님의 고난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고난으로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해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으로 인한 탄식과 애통이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명목삼아 자기 죄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를 용서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관심은 여전히 자신에게 두는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감각이 있고 그 죄로 인해 울 수 있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처럼 애통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죄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것 또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가능한 것이고 모든 마음을 주께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당연한 유다의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다’는 것이 그 의미입니다. 생명을 회복시켜줄 자는 멀리 떠났고 원수가 이긴 것이 유다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있는 유다의 실상이고 우리의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원수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로 원수에게 붙들려 있던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 있는 신자의 본분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당연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이긴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통이 없는 자와 다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애통은 단지 슬픔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승리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애통이 없으면 자신의 의를 근거로 한 종교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애통으로 인해 그 모든 의가 무너지고 예수님의 이기심만 높임 받게 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세계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 예레미야애가 (10강) 새롭게 하사 신윤식 2014.04.20 3030
9 예레미야애가 (9강)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 신윤식 2014.04.13 3145
8 예레미야애가 (8강) 슬프다 신윤식 2014.03.30 3062
7 예레미야애가 (7강) 깊은 구덩이에서 신윤식 2014.03.23 3101
6 예레미야애가 (6강) 하나님의 성실 신윤식 2014.03.16 3136
5 예레미야애가 (5강) 선지자와 메시아 신윤식 2014.03.09 2837
4 예레미야애가 (4강) 어리석은 묵시 신윤식 2014.03.02 2997
3 예레미야애가 (3강) 원수 같이 되어 신윤식 2014.02.23 2939
» 예레미야애가 (2강) 선지자의 고통 신윤식 2014.02.16 3073
1 예레미야애가 (1강) 선지자의 슬픔 1 신윤식 2014.02.09 3325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