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3.02 10:39

(4강) 어리석은 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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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2:11-22http://onlycross.net/videos/lam/lam-02112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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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설교>

 

세상에는 인간의 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애통에 저와 여러분의 애통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인간의 애통은 구구절절 사연들이 다릅니다. 돈 문제, 자식 문제, 인간관계 등 수많은 문제로 인해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결론은 모두가 자기 문제로 인해 애통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선지자는 다른 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절에서 선지자는 눈이 눈물에 상하며 창자가 끊어지며 간이 땅에 쏟아졌다는 것으로 애통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애통은 유다가 겪은 환난으로 인한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자기 문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다의 환난은 유다의 죄로 인한 것으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배척한 것에 대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망한 뒤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에 남은 백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선지자처럼 유다를 바라보고 애통해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살 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애굽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의 일반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유다가 망하긴 하였지만 선지자 개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유다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 밖에 있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깊은 애통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선지자의 마음은 단순한 애국심도 아니고 민족주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지자는 유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죄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죄로 인해 애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1장에서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고 반역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한 사람은 유대 백성들입니다. 선지자는 그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며 애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애통은 본래 유다의 애통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자신의 애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을 때 죄로 인한 애통이 나와야 함을 자신의 애통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유다가 망하고 고통을 겪게 된 것을 그들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2:5절에서는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원수 같이 대하신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원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을 세워서 인간됨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증거하는 도구로 그들을 택하신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이방인과 다른 특별한 존재의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존재인 것은 맞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거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됨을 크게 착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은 무조건 자신들을 평안과 복으로 인도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을 바라보면서 자신들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죄 가운데 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보지 못하는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가 증거하는 말씀 하나하나는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에 대해 듣기를 싫어했고 귀를 닫았으며 선지자를 배척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선지자의 말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헛된 묵시도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라고 말합니다.

 

 

네 선지자란 유다 백성이 참된 선지자로 여겼던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이들의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죄를 보지 못하고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참된 묵시는 죄악을 드러내어 사로잡힘에서 돌이키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이고 말씀의 기능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유다는 죄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죄가 많음을 책망하고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가 많은 그들의 실상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묵시는 오직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음에 온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묵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두게 하지 못하는 묵시는 묵시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했다고 할 수 있기에 헛된 묵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묵시인 말씀은 우리를 낮아짐의 자리로 끌어갑니다. 낮아짐의 자리에서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는 내가 아니라 주께 있다는 사실에도 눈을 떠야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진정한 묵시입니다.

 

 

신자를 위한 언약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복음이며 복음의 가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묵시와 헛된 묵시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묵시는 인간이 먼지에 불과한 존재임을 드러내지만 헛된 묵시는 의를 드러낸다는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헛된 묵시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가 은혜를 자기감정과 환경의 변화에서 감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가는 배재한 채 다만 자신의 감정이 뜨거워지고 힘들었던 환경이 나아지는 것을 은혜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된 묵시는 사람을 이러한 은혜에 붙들어 놓기 위해 죄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 평안을 외치고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선지자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확증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예수님이 곧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했다면 자신들의 죄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았어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아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시고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씀은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지금의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거저주신 은혜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와 사랑에 대한 오해는 참으로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원인이 헛된 묵시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드러내는 말씀에는 귀를 닫고 인간의 의와 가치를 선전하고 복과 평안을 외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도 단지 자신을 복되게 하는 것으로만 이해될 뿐입니다. 십자가는 그저 말에 머물 뿐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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