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3.09 09:41

(5강) 선지자와 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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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18http://onlycross.net/videos/lam/lam-0301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설교>

 

신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신자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의 신자 됨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에 어떤 삶에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는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움이며 신자의 신자 됨인 것입니다. 이것 말고 신자 됨을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은혜를 아는 신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이 내게 함께 하심을 무한한 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신자의 본질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그것으로 신자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열심과 실천으로 신자 됨을 이루고 지키려고 만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그런 자신을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가 뜻한 일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방향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방향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위한 나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나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나는 신자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호소하는 고난의 내용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 당겨 고백합니다. 1절에서도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는 말로 자신이 여호와의 분노의 매를 맞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종일 손을 들어 자주자주 치신다는 내용들이 예레미야 한 개인의 고난을 말하기보다는 장차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메시아로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신 메시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고난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4절의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라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유다가 무너지고 고통을 겪는 것을 단순히 죄에 대한 심판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유다의 멸망에는 하나님이 유다에게 행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고, 선지자는 그 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다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아는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진멸되지 않은 것은 여호와의 무궁하신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그들에게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무궁하신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은 한순간도 유다에게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순간도 유다와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유다에게 왜 그런 고통과 환난이 주어진 것일까요?

 

 

이유는 유다의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에게서 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유다는 회복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죄로 인해 멸망한 유다를 다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로 하여금 유다의 죄를 대신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선지자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보면 소망은 없습니다. 죄를 보게 되면 우리는 무너져야 할 사람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주를 피할 수 없이 우리의 본래 운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나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21절에서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라고 말합니다. 심판과 저주를 마음에 담아둠으로 인해 여호와의 무궁한 인자와 긍휼에 눈이 열리게 되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 소망을 두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자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음으로 저주를 받아야 할 죄인의 자리에서 자신을 본다면 소망을 세상 그 어디에도 그 무엇도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모든 죄를 덮어주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소망 가운데 있는 신자라면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실 인자와 긍휼 외에 다른 것은 소망에서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심판과 저주를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저주의 자리가 여러분의 본래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러분이 저주에서 건짐 받은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그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래 기특하다’고 하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은혜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힘으로 값을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피 흘리심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가치를 가진 것이 있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힘과 열심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6절)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위해 해야 할 것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현대 교회의 신앙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현대 교회는 잠잠히 있는 것을 게으른 신앙으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조차 의심해 버리는 속성으로 인해서 잠잠히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잠잠히 있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분명히 새겨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에게서 나오는 무엇인가로 인해서 유지되고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악일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선한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악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선하게 보인다는 것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선악개념에 의한 착각일 뿐입니다. 그 착각에 빠지지 않아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심판과 저주를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과 저주가 담긴 마음에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인자와 긍휼에는 메시아의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선지자가 자신의 고난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셨음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길에서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조차 여호와의 복으로 간주하며 기쁨과 감사로 주를 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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