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3.16 10:19

(6강) 하나님의 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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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9-33http://onlycross.net/videos/lam/lam-03193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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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설교>

 

예레미야 선지자는 22절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알다시피 예레미야가 애가를 부를 때는 유다가 멸망을 당하고 왕과 귀족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 때였습니다.

 

 

선지자는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당연한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다는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레미야에게 다가온 인자와 긍휼은 어떤 것이기에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인자와 긍휼의 무궁함을 노래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는 유다가 진멸되지 않은 것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보고 있습니다. 유다가 비록 멸망하기는 했지만 진멸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무너지고 왕과 귀족들,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고초를 겪고 있긴 하지만 유다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궁하신 인자와 긍휼로 여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멸당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를 진멸하지 않은 것을 인자와 긍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인자와 긍휼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인자와 긍휼은 진멸 당할 자를 진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인자와 긍휼도 바벨론으로부터 유다를 지켜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보신 결과입니다. 그들의 죄를 보셨다면 진멸이 당연한데도 진멸하지 않으신 것에서 인자와 긍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23절에서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로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인자와 긍휼과 다르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으로부터 구하시는 인자와 긍휼을 베푸셨다면 유다는 매일 아침 인자와 긍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려면 매일 아침 멸망이 마땅한 자신들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멸망이 마땅한 자신에게 넘치는 은총으로 다가올 때 아침마다 새로운 인자와 긍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유다에게 그러한 눈이 있었을까요?

 

 

유다는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배역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그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의 외침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의 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다가 우상을 섬긴 것은 그들이 누리는 현재에 대해 불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많은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뭘 말할까요? 현재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많은 것을 채우고 싶어 한다는 것은 현재 조차도 그들이 누릴 수 없는 은총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었음을 뜻합니다.

 

 

멸망이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면 하루의 삶도 새로운 은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인데 유다에게는 새로운 은총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구원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아침마다 새로운 것으로 고백할 수 없었음이 당연합니다.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그들을 멸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진멸하지 않으신 것은 유다에게 행하실 하나님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자와 긍휼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진멸이 당연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진멸이 당연하다면 유다의 멸망은 곧 진멸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여전히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 아침이 바벨론에서의 아침이든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의 아침이든 분명한 것은 유다는 아침을 맞이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로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말하는 주의 성실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는 주의 성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다는 진멸을 받아야 할 원수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유다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인자를 아는 백성이 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은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 유다의 멸망은 단지 죄에 대한 심판일 뿐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유다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무궁하신 인자와 긍휼을 봤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며 하나님이 뜻하신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본 것입니다.

 

 

지금도 신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서 주어진 일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아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게 하심으로 사랑과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처럼 아침마다 인자와 긍휼이 새롭다는 고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일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이기 때문에 필요하시다면 유다처럼 우리 또한 고난의 길을 가게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고난에서도 인자와 긍휼을 노래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생소하게 다가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수준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다의 멸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에 참여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가 무너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멸망하게 하셨다면 유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아니 유다보다 더 형편없는 나 또한 멸망이 당연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 존재를 알게 될 때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 주어지는 것에서 은총을 확인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2,33절을 보면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고생하게 하시고 근심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심을 알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킨 죄 문제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죄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누구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결론을 마음에 품고 ‘그런데도 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세상 누구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그저 ‘존재하니까 존재한다’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면서 고생하게도 하시고 근심하게도 하시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즐거워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인자와 긍휼을 증거하는 증거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본심에 의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고생과 근심이 있는 삶에서도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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