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3.23 09:59

(7강) 깊은 구덩이에서

조회 수 310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애 3:55-66http://onlycross.net/videos/lam/lam-03556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설교>

 

신자가 마음에 진리를 품고 가는 신앙의 길은 어떤 것일까요? 진리를 품고 예수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크신 복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신앙의 길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 44:22절에 보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끌어가는 자리는 도살한 양처럼 여김 받는 죽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러한 죽임의 자리에서 나타나고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서 확인하고자 한다면 진리가 이끄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형식만 남은 신앙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죽임의 자리로 끌어가는 것은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5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은 시드기야 왕 때의 일입니다.

 

 

렘 38장에 보면 예루살렘의 고관들이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재난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왕에게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청원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말 때문에 군사와 백성이 낙심하게 된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고관의 청원에 시드기야는 마음대로 하라 하고,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아의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입니다.

 

 

깊은 구덩이는 죽음의 자리와 같습니다. 즉 예레미야는 죽음의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는 왕궁 내시가 왕에게 간청해서 구덩이에서 구출 받게 됩니다. 겉으로는 예레미야가 죽음의 위기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셔서 구출하여 주신 것이 됩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신앙의 내용일 것입니다.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면 예레미야를 죽임의 자리로까지 밀어 넣으신 하나님의 뜻이 묻히게 됩니다. 선지자가 구덩이에 갇힌 것도 구출된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대개의 사람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도의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죽임의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56절에 보면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여전히 구덩이에 갇힌 형편에서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한 것을 보면 구덩이에서 구출되는 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기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음성을 이미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 나의 음성을 이미 들으셨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음성을 들으신 것은 세상의 것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죽임의 자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먹고 사는 문제에 붙들려서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편한 삶을 꿈꾸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으시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임의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품고 있는 신자에게 진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죽임의 자리인 깊은 구덩이에서 듣게 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구덩이조차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떤 자리에서든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는 불의가 없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구덩이에 갇힌 것이 외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의 결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서 두려움이 없는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우리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앞에서 우리의 뜻은 악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뜻이 악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전도나 선교, 구제 등 신앙의 선으로 여기는 일에 뜻을 두고 있다면 더욱 자기 뜻의 악함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뜻은 선하기에 하나님이 내 뜻을 도와서 잘 되게 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기 마음을 선하게 여기는 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선악기준에 의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이 선하다는 것을 당위성으로 해서 떳떳하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두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뜻을 도우시고 잘 되게 하시겠다는 위미가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선한 뜻에 붙들려 흘러가고 있음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깊은 구덩이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한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깊은 구덩이에서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밀어 붙이시는 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고 두려움 없이 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으시고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붙들린 신자의 삶의 내막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리를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두려운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흔드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까? 세상에서 실패하고 남들보다 낮아지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뜻한 실패 한다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일을 실패하게 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일이 분명히 있고,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은 항상 보이는 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말씀을 들으며 내가 이끌림 받는 신앙의 길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58,59절을 보면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진리를 품고 가는 신앙의 길에는 원통함과 억울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진리를 환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론 진리 때문에 배척을 받고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하나님의 진노이며 저주입니다. 진리를 품고 사는 그 길만이 생명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확실한 믿음의 내용으로 자리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억울함과 고통이 있는 길로 밀어 넣으신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길로 이끄십니다. 주의 은혜와 사랑을 소원할 수밖에 없는 길로 밀어 넣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신자는 모든 인생에서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 예레미야애가 (10강) 새롭게 하사 신윤식 2014.04.20 3030
9 예레미야애가 (9강)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 신윤식 2014.04.13 3145
8 예레미야애가 (8강) 슬프다 신윤식 2014.03.30 3062
» 예레미야애가 (7강) 깊은 구덩이에서 신윤식 2014.03.23 3101
6 예레미야애가 (6강) 하나님의 성실 신윤식 2014.03.16 3136
5 예레미야애가 (5강) 선지자와 메시아 신윤식 2014.03.09 2837
4 예레미야애가 (4강) 어리석은 묵시 신윤식 2014.03.02 2997
3 예레미야애가 (3강) 원수 같이 되어 신윤식 2014.02.23 2938
2 예레미야애가 (2강) 선지자의 고통 신윤식 2014.02.16 3072
1 예레미야애가 (1강) 선지자의 슬픔 1 신윤식 2014.02.09 3324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