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3.30 10:12

(8강) 슬프다

조회 수 306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애 4:1-10http://onlycross.net/videos/lam/lam-04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설교>

 

애가는 ‘슬프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2:1절에서도 슬프다는 말이 있고 본문 역시 슬프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하는 것은 유다가 처한 형편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슬픔을 단지 유다가 겪고 있는 비참한 형편에 대한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비참함을 바벨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행해진 사건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슬픔은 단지 현 상황에 대한 감정적인 눈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를 슬프게 한 유다의 비참한 상황은 여호와의 분과 맹렬한 진노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맹렬한가를 본문에서 확인해 보십시오. 4절을 보면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심했는지 젖먹이조차도 어미에게서 젖을 얻지 못할 정도입니다. 먹지를 못해 얼굴이 숯보다 검게 되고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라 알아보지 못할 정도입니다(8절).

 

 

굶주림의 고통은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컸습니다. 심지어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을 정도이니 그 비참함과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규정된 사실입니다. 렘 34:13-14절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여 형제 히브리 사람이 종으로 팔려왔다 해도 칠년 되는 해에는 자유롭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도 선조들처럼 말씀을 따르지 않음으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음을 말씀하시면서 언약을 어긴 그들을 대적하여 유다를 바벨론 군대의 손에 넘기고 예루살렘 성은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유다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처참함을 겪고 있습니다.

 

 

유다의 처참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언약에 성실했다면 지금의 재앙에 처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예레미야의 슬픔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은 유다를 향한 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처한 상황은 분명 누가 봐도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저주의 상황에서 저주가 주어진 이유를 알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자신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주고자 하신 복의 의미입니다.

 

 

비참한 저주의 상황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저주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향해 마음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레미야의 ‘슬프다’는 애통은 저주 아래 있는 유다의 실상이 되는 것이고, 그 애통은 오늘 우리의 애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서 ‘슬프다’는 애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전에는 내 한 몸 편안함을 누리는 것을 복과 은혜로 간주했는데, 이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는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복과 은혜로 주어진 것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순금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빛을 잃고 변질하였습니다.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 받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비참한 상황에 빠지기 전에는 자신들을 순금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신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순금이고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이니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드러난 그들의 실상은 빛을 잃고 변질된 존재일 뿐이며 질항아리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기 실상에 눈이 열린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에 대해 크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유다처럼 자신을 순금,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로 간주하고 복과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금이나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로 대접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변질되었고 질항아리일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복이며 은혜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하신 모든 일에서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에게 행해진 하나님의 저주는 그들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이 곧 위로와 힘이 됩니다. 신자가 어려움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어려움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었을 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아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라고 말합니다.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손을 대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내 백성의 죄, 즉 유다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겁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시고 무너뜨린 소돔의 죄보다 유다의 죄가 더 크다면 유다에게 당연한 무엇입니까? 소돔의 심판입니다. 소돔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하나님이 손을 대셔야 할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유다만 그럴까요? 우리 모두도 소돔의 죄보다 무거운 죄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소돔처럼 무너져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대시고 무너뜨리시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은 이것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존재로 보기보다, 사랑 받아야 할 존재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 골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잡고 싶은 것만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복을 복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복과 은혜입니다. 자신을 보면서 ‘슬프다’는 애통이 나올 때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 예레미야애가 (10강) 새롭게 하사 신윤식 2014.04.20 3030
9 예레미야애가 (9강)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 신윤식 2014.04.13 3145
» 예레미야애가 (8강) 슬프다 신윤식 2014.03.30 3062
7 예레미야애가 (7강) 깊은 구덩이에서 신윤식 2014.03.23 3101
6 예레미야애가 (6강) 하나님의 성실 신윤식 2014.03.16 3136
5 예레미야애가 (5강) 선지자와 메시아 신윤식 2014.03.09 2837
4 예레미야애가 (4강) 어리석은 묵시 신윤식 2014.03.02 2997
3 예레미야애가 (3강) 원수 같이 되어 신윤식 2014.02.23 2939
2 예레미야애가 (2강) 선지자의 고통 신윤식 2014.02.16 3073
1 예레미야애가 (1강) 선지자의 슬픔 1 신윤식 2014.02.09 3325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