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4.13 09:45

(9강)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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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4:11-22http://onlycross.net/videos/lam/lam-04112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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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12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13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15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6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18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19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21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22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설교>

 

유다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는 내용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이런 고통으로 밀어 넣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11절에서도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해 분노하셨고 맹렬한 진노를 유다에 쏟으심으로 예루살렘을 불사르신 것입니다. 또한 대적과 원수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예루살렘을 철저히 짓밟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고통은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봐야 할까요?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신마저 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욥을 향해서 친구들은 ‘죄로 인한 재앙이니 회개하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없다면 고통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욥의 친구들의 논리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해 상식처럼 굳어져 있는 우리의 생각임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재앙이나 고통과 상관없이 편한 환경에 있을 때, 그것을 마치 자신이 죄에서 멀어져 있고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죄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고통을 겪으면 ‘혹시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평안하면 죄에 대해 생각이 둔해지는 것입니다.

 

 

삶에 고통이 있든 없든 인간의 죄 가운데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도 죄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때때로 고통과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이 죄에 대한 보응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 곧 죄에 대한 보응이고 심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편한 인생을 살고 많은 것을 누린다고 해서 믿음으로 인한 복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13절을 보면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고 말합니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유다에게 진노하셔서 재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죄에 대한 보응인데 왜 죄에 대한 보응으로만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유다의 재앙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보응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유다가 재앙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일은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도 중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비록 슬픈 노래이긴 하지만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를 향해서 계속 말씀 하시는 것은 유다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죄에 대한 보응이 전부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불을 지르고 그 터를 살랐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시온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었고, 성전에서 제사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참된 신앙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온을 불사르십니다. 그것으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다의 신앙은 신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다의 열심과 모든 정성들은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즉 시온을 불사르신 것들은 유다가 신앙으로 여겼던 그들의 열심과 정성을 불사르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고통을 겪고 있지만 유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세워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간적 방식으로 생각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방인들도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힘으로는 도무지 지탱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반면에 19절에서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대적은 강하고 빠르게 우리를 잡으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히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힘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빙자해서 힘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를 철저하게 무너뜨리십니다. 이방인도 유다의 회복이 불가능하다 여길 정도로 약자의 자리로 밀어 넣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살리심으로 유다의 회복이 유다의 열심이나 힘과는 무관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22절에 보면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멸망하고 포로 된 고통이 없이 평안하게만 살았다면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한 기쁨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포로 된 경험이 없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는 말씀이 자신의 현실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한 은혜와 감사를 아는 자 되게 하기 위해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유다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모든 것을 자르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뼈 속 깊이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를 붙드시고 사로잡혀 가지 않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은 우리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삶이 우리가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말 그대로 축복의 삶이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뻐하는 신앙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위해 삶에 원하지 않는 많은 장애물을 세우시고 부딪치게 하십니다. 부딪히고 깨어지게 하시면서 힘으로 간주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악에 사로잡혀 가지 않도록 붙드시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사르신 시온은 다시는 사로 잡혀 가지 않도록 도우시지만, 에돔에 대해서는 그 죄악을 벌하시고 허물을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유다가 고통에 있을 때 에돔은 평안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평안이 에돔의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유다의 고통 또한 유다의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의 삶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끌려 갑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새로운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불안과 두려움보다는 기쁨과 감사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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