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4.04.20 10:07

(10강) 새롭게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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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5:19-22http://onlycross.net/videos/lam/lam-0519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설교>

 

유다 처한 현실을 보면 출애굽 전 애굽에서 종의 신분으로 지내던 시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2,3절의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라는 말씀에서도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처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처지에 있다면 가장 먼저 힘든 처지에서 건져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5장의 예레미야의 기도를 보면 유다가 처한 고통에서의 해방을 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기도의 중심에 예레미야 자신도 유다도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그 운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문제로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복을 주시고 힘든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실천을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실천만 있으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습니다. 6,7절을 보면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유다의 죄는 애굽, 앗수르 사람과 악수한 것이었습니다. 악수한 이유는 양식을 얻어 배부르기 위함입니다. 즉 배부름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강대국을 의지한 것이 유다의 죄였습니다.

 

 

유다 백성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배부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는 배부름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강대국을 의지한 것입니다. 지금의 교인들이 막연한 것으로 다가오는 생명이나 부활의 문제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의 죄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때부터 만연한 죄였고 그 죄를 그대로 따랐으며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고통에서 그들의 죄를 바라봅니다.

 

 

죄를 보게 되면 현재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게 되고 현재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기에 문제 해결을 요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보게 되면서 오직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시작입니다.

 

 

22절에 보면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버리셨다는 것은 유다의 고통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할 정도로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다고 말합니다.

 

 

유다를 보면 우리 역시 아주 버림을 받아야 하고 크신 진노를 받아야 할 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보다 나의 배부름에 힘이 되는 것을 의지하고 좇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생각한다면 유다의 고통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할 몫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다보다 편한 환경에 있다고 해서 유다보다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이 주신 현재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 또한 진노를 받아야 할 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자각하는 신자는 자기 배부름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십계명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른 자로 존재할 권리조차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부정은 자신의 죄의 실체를 아는 것으로 가능하기에 자신의 죄를 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신자가 복된 존재라는 것은 절대로 세상의 것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없겠지만 설사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만족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죄를 알고 심령이 가난해 짐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야 말로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로 생존하였습니다. 만나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굶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매일 공급되는 만나를 먹으면서 자신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고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배우게 하는 것이 만나의 의미였습니다. 즉 세상의 양식이 이스라엘을 살게 하는 힘이 아님을 대대로 잊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배부름을 좇았고 결국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망각한 것이고 그들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심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옛적 같게 해달라는 것은 유다가 함락되기 전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관계에 있던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께로 돌이켜 달라는 것은 애굽이나 앗수르처럼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대로 이루심을 믿는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늘 소망 두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늘 새로운 존재로 주께 온 마음을 두는 신자 되는 것이 소망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로 유다를 주께 돌이켜 달라는 것이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유다가 자기 고통에서 죄를 자각하게 되고 그들의 존재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깨달으며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는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께로 돌이킴 받은 새롭게 된 신자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감추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이 여과 없이 그대로 다가오게 되면 나 같은 자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이 감사와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알기에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의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 나를 지키시고 붙드시는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22절)는 이 말씀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른 것으로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구절 하나로 충분합니다. 버림받음과 진노가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이 운명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버림받음과 진노를 주께서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은총 안에 붙드시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고 주께로 돌이키게 하신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세상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복입니다. 이 복의 세계를 사는 것이 곧 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망하는 것에 미련두기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새롭게 심어주신 소망에 뜻을 두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신자가 진심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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