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2.17 17:30

(107강) 레위인의 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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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4:9-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4409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10.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 행하여 그 우상을 따라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11.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수종들어 성전 문을 맡을 것이며 성전에서 수종들어 백성의 번제의 희생물과 다른 희생물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12.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 이스라엘 족속이 죄악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이 그 죄악을 담당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그들이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14.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성전을 지키게 하고 성전에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설교>

믿음은 예수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 믿음을 증거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취약한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힘없이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을 세상이 수긍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취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취약한 세계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라면 기독교의 변질은 무엇일까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설득력을 갖춘 기독교로 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병든 자를 치료하거나 삶의 환경을 안정된 상태로 바꾸거나 심리적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상태를 받아들이며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상식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는 기독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믿음을 내세워 인간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믿을만한 가치 있는 종교로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변질이라면 자신의 상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보다는 자기 인생, 자기 운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이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생명이 되신다는 현실에 눈을 뜬 자만이 예수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믿음이 납득되십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곧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세계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흥미를 잃고 좀 더 확실한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남편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두는 것처럼 한 눈 파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충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곧 생명의 완성이며 생명의 완성 앞에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의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이 생명의 완성을 담고 있기에 예수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참여되기를 믿는 믿음의 세계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으로 충분한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약속의 세계를 믿기에 병든 몸도, 힘들고 어려운 형편도 그대로 안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충분한 것이 신자임을 알았다 해도 기쁨과 감사만이 아니라 불평이나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회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험으로 이끌어 가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9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을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은 성소의 거룩을 위함입니다. 이방인이 성소에 들어오는 것이 곧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방인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분명한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입니다. 사람됨과는 무관하게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그가 이방인입니다.

 

 

결국 이것은 모든 인간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또한 이방인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몸에 할례를 받았다 할지언정 마음에 할례를 받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규례를 따라 몸에 할례를 받은 것이라면 그 또한 몸의 할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의 할례를 받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의미는 자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몸의 할례는 얼마든지 인간의 손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할례는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겔 11:19-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새 영을 주시는 것은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것이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곧 돌 같은 마음을 잘라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 마음, 즉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 된 그들만이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고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왜 이스라엘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 하시는 것입니까? 어차피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무너뜨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손으로 행했던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영을 주어 새 마음이 되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새 마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을 받아 새 마음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는 자신들이 완전히 무너진 것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으며 죄악을 행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한 마음입니다.

 

 

신자는 마음으로 새롭게 된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자기 운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곧 마음에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독교와 종교의 다름은 이것으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자신을 무너져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원수 된 죄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과 영광과 힘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지를 못합니다. 다만 바라보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반면에 종교는 자신을 무너져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손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이름이 높임 받고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운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운명에 들어오셔서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인생으로, 운명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 행하여 그 우상을 따라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에서의 제사를 책임지는 것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민수기 1장에 보면 레위인의 직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그 진영별로 각각 그 진영과 군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민 1:48-53)

 

 

레위인의 직무는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막에 대한 책임에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이는 것도 있습니다. 즉 성막이 이방인으로 인해서 더렵혀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막의 문지기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행하여 하나님을 떠날 때 레위 족속도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 “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수종들어 성전 문을 맡을 것이며 성전에서 수종들어 백성의 번제의 희생물과 다른 희생물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떠난 레위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성전에서 수종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떠난 레위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12절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 이스라엘 족속이 죄악에 걸려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 사람이 그 죄악을 담당하게 하심으로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시고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12,13절).

 

 

그런데 14절에서는 다시 “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성전을 지키게 하고 성전에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레위 사람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하나님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원한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 따라간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미 3:10-11절에 보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고 말씀합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 돈을 위해 일합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깁니다.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하나님을 떠나 그릇 행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성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면서도 불구하고 성전을 찾아 제사하면서 복을 구합니다. 종교 의식만 남은 성전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손으로 행한 의식을 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착각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심판을 쌓는 것이었을 뿐임을 성전을 무너뜨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레위 사람을 다시 세워 성전을 지키게 하고 성전에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다시 맡기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을 사람이 되었기에 맡기는 것일까요?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한 것처럼 보였다가도 생존이 연결된 문제에서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떤 본성으로 하나님을 찾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멀리 떠난 레위인과 동일한 길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해야 할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다시 세워서 성전을 지키게 하고 성전에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는 것은 외인, 즉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자가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사고방식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행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은 은혜와 사랑만을 증거하라고 부르셔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고 말씀하신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성전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직무가 있습니다. 외인,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막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 당연한 우리에게 주어진 직무입니다. 이 직무를 위해서 새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성전인 자신을 지키는 직무를 다하게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운명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을 받아들인 자가 자기 이름과 영광을 세우기 위한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름과 영광이 무너지고 잃는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세워지는 길로 가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이면서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이고 레위인입니다.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가 곧 우리 자신임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것은 심판이라는 것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오늘의 말씀은 여러분과 무관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자로 여겨진다면 그런 우리를 다시 성전을 지키는 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 당연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살게 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레위인으로 세움 받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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