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2.24 17:10

(108강) 제사장 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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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4:15-19http://onlycross.net/videos/eze/eze-44151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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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내가 맡긴 직분을 지키되

17.그들이 안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과 성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18.가는 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 베 바지를 입고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19.그들이 바깥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지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라

 

 

<설교>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용도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전에서 행해지던 것이 제사였고, 제사를 주관하던 이들을 일컬어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직접 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제사장이 주관했기 때문에 제사장은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자로 여겨졌고 따라서 제사장의 위치와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왕도 신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을 대리하는 제사장은 어떤 면에서는 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사는 매우 중요한 신앙 행위였습니다.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 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어야 신의 진노를 피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특정 사고방식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성입니다.

 

 

인간은 삶의 평안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원치 않은 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삶이 계속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를 상상하게 되고 신적 능력을 도구 삼아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신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어야 했고 그런 점에서 제사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신앙 행위로 자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만 소홀히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사를 기뻐하는 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제사가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던 그들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은 자연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제사도 제사장도 이스라엘이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제사 규례를 주시고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을 세우신 의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할 도리는 다한 것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당시 제사장은 제사장 직무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제사장 역시 하나님이 제사 규례를 세우신 의도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제사장 직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제사장 직무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마치 오늘날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보면서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제사하면서도 제사 규례를 세우신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사장 또한 제물을 잡고 그 피를 성소에 들고 가면서도 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했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의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15절의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씀처럼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소의 직분을 지킨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제사장의 직분에 대한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소의 직분을 지켰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 28:1-3절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를 주관합니다. 그리고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사 의식이 있었다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에 참여하는 자신이 죽음의 존재인 것을 알아야했고 죄 없는 제물이 자신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즉 죄를 담당하는 죽음이 없이 죄 용서는 없음을 제사를 통해서 배우며 주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띠라서 제사장 직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음을 보여주는 일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이며 제물의 죽음 없이는 죄가 용서 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저주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장 직분인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죽음을 봅니다. 그리고 제물의 희생의 피에서 생명을 봅니다. 때문에 제물의 피를 들고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로 나아갈 때에는 그 피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고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에 있게 한다는 사실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대해 감시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자비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게 하는 것이 제사장의 존재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 제사, 제물, 제사장 직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모아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이 죽을 존재인 우리를 살게 하셨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먼저 관심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자바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 문제로 향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삶의 중심에 자신이 자리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자신을 위해 하게 됩니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신을 찾고 제사하고 섬기고자 하는 모든 일의 이유가 자신의 높아짐과 영광을 얻기 위한 것으로 모아질 뿐입니다.

 

 

즉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여기에는 제사장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제사장 직분을 자기 몸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민 18:6,7절을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의 형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회막의 일을 하게 하신 레위인이며 제사장 직분입니다. 회막의 일에 함께 할 수 있는 형제 레위인이 있고 제사장이라는 직분 자체가 선물이 된다면 제사장은 회막에서 제사장으로 존재하고 하나님께 제사한다는 것만으로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하나의 이론으로써 마음에 밖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마음속에 침투하여 실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제사장은 실패했고 결국 그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사장 직을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모든 제사장들은 제사장 직에 대해 실패했지만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은 성소의 직분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성소의 직분을 지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8절에 보면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물의 직분은 레위 사람들에게 해당된 일입니다. 그런데 성소에 사람을 두어 그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다면 레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소홀히 했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소에서의 직분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이 성소의 지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소의 직분을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하며 귀하게 여겼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소의 직분, 즉 제사장의 직분을 귀하게 여겼다면 세상에서의 자리에는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이득을 따라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왕상 1장에 보면 다윗 왕이 늙었을 때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제사장 사독은 나단 선지자와 함께 다윗의 명을 받아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자칫 아도니야에게 죽을 수도 있었지만 사독은 눈에 드러난 현실을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다윗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실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가운데 저주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 말은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볍게 여긴다는 것과 같습니다. 언약에 관심 두지 않는다면 자연히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족속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16-19절에 보면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내가 맡긴 직분을 지키되 그들이 안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과 성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가는 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 베 바지를 입고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지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으라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사치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땀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이 입는 옷과 옷을 매는 띠는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고생하면서 일을 해야 먹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자기가 책임지는 속성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야 할 저주의 모습이며 증거라는 것입니다.

 

 

땀은 인간의 수고를 의미합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주어진 방식입니다. 하지만 성소에서의 제사장 직분은 땀이 나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수고와 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얻어진다는 것이 성전이 증거하는 참된 의미입니다. 제사장은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봉사하는 자기 때문에 땀이 나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저주에 속한 자가 거룩한 자가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수고와 무관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소는 거룩의 세계입니다. 거룩의 세계에서 제사장이 할 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별입니다. 이처럼 구별된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제사장이며 20-27절의 내용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다시 시행해야 할 규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모든 규례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규례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수고하여 땀 흘려 거두어야 할 열매가 없습니다. 모든 수고는 예수님이 하셨고 그로 인한 열매를 우리가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족함이 없는 완성의 세계를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길로 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신 앞에서 자신의 수고와 열심을 쏟아내면 신이 자기들을 외면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수고해야 얻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은혜의 세계를 알지 못한 저주의 존재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롬 15:16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할 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하는 것을 복음의 제사장 직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제물이란 죽은 존재를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죽은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울이 말한 제물로 드린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지금도 소위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다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사와 함께 제물에 대한 규례를 세우신 것은 소나 양을 바치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죽어야 할 존재로 나와야 함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사와 제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와 제물의 참된 의미가 살아있어야 참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 바쳐지기 위해 나오십니까? 우리의 본성은 절대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원합니다. 이런 우리를 제물이 되어 바쳐지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죽음의 존재로 하나님께 나오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선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자신을 제물 삼아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가득 채우고도 남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살고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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