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2.31 16:44

(109강) 부정과 정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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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4:20-27http://onlycross.net/videos/eze/eze-4420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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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21.아무 제사장이든지 안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22.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 들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족속의 처녀나 혹시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23.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24.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며

25.시체를 가까이 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 가지 아니한 자매를 위하여는 더럽힐 수 있으며

26.이런 자는 스스로 정결하게 한 후에 칠 일을 더 지낼 것이요

27.성소에서 수종들기 위해 안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속죄제를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우월적 존재가 되는 것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이 본성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그것도 인간이 선의 기준으로 추구하는 도덕, 윤리, 종교 등을 가리지 않고 아주 왕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통해 자신의 우월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나 신앙적 행동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감을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악한 본성적 활동인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될 때 다른 가치를 좇습니다.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갖춤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에 의해서 신앙 세계도 혼탁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존귀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는 신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존귀하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하찮은 존재입니까?

 

 

물론 인간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이 존귀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신자는 그리스도라는 존귀하신 이름을 덧입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영원한 멸망에 갇힌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영광을 누릴 생명의 속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존재 가치를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예수님을 말하는 교회조차도 신자의 존재 가치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신 분으로 말하면서도 신자로서의 존재 가치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지 않는 이상한 현상으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신자 된 의미와 가치는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한다면 결국 다른 가치를 좇게 됨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신자로 자처하면서도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동일하게 추구하고 거기에서 존재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 그리스도를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주변의 국가에 비해 자신들이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 국가가 누리는 부요에 비해 자신들의 삶의 처지는 훨씬 못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인간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강한 국가를 이루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 인간적 방법이 이방 나라의 우상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였을 뿐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이스라엘은 존재 자체가 더러운 것입니다. 이처럼 더러운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그 역할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은 제사장의 정결 규례와 그 역할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23절에서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는 이것이 제사장의 존재 의미고 역할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제사장 자신이 거룩하고 정결한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털을 밀지도 길게 자라게 해서도 안되고, 안뜰에 들어갈 때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아야 하고,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않아야 하고 시체를 가까이 하여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아야 하는 모든 규례가 제사장의 정결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규례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서 지켜야 할 규례로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이미 주어진 규례입니다. 그 규례를 왜 또 다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레 10:8-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역할로 세워진 것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규례는 구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추구하는 것은 속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속된 것, 즉 부정한 것을 받지 않습니다. 성전 안뜰의 동쪽 문이 닫힌 것도 그 이유입니다. 부정한 존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는 운명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별을 가르치며 그들을 거룩한 백성 된 길로 인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역할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그 역할을 잘했을까요? 제사장 역할을 잘 했다면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 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규례에 따른 자신들의 역할에 실패했습니다.

 

 

만약 제사장이 제사장 규례를 잘 지켜서 스스로를 속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구별하고 분별하며 거룩한 제사장으로 존재했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로 여김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거룩을 위해 두신 것이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제사장의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만 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든 거룩한 백성으로 구원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을 바라보며 그들을 본받아 구별된 길로 나아가야 했고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며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제사장 나라’라고 합니다.

 

 

출 19:5-6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제사장 나라가 속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나라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것이 무엇이며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가르침으로써 이스라엘을 구별된 나라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제사장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취지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취지를 따라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실패한 제사장 이야기와 제사장 규례를 왜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소의 직분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제사장 규례는 사독 자손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은 성소의 직분을 지킨 사독 자손 제사장들에 의해서 제사장 규례가 지켜지고 그들로 인해 부정한 존재가 거룩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됨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독 제사장은 다윗 왕 때 다윗이 임명했습니다. 즉 다윗에게 속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 언약에 속한 제사장이라는 의미로도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독 자손 제사장은 아론 자손의 제사장과 다른 가문의 제사장을 뜻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등장하는 제사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곧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성소에서 수종들기 위해 안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속죄제를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 하여 스스로를 더럽힐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가지 아니한 자매가 죽었을 때는 그 시신에 가까이 하는 것을 허용은 하지만 더럽혀진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정결하게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낼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수종들기 위해 안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는 속죄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레 4:3절에 보면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속죄제는 죄를 용서 받는 제사입니다. 부정한 자가 속죄제를 통해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물론 단지 제사를 드린 것으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피로 인해 용서되는 것입니다.

 

 

레 4:11-12절에 보면 속죄 제물은 피는 성소의 휘장 앞에 뿌려지고 기름과 콩팥은 떼어져 번제단에서 불사르지만 나머지 전체는 성전 바깥 재버리는 곳으로 가져다가 불사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는 예수님에게로 연결 됩니다.

 

 

히 13:11-12절에서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는 이 내용이 예수님이 곧 속죄 제물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더러움을 담당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성전에서 제사장 규례와 제사장 역할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규례를 완성하시고 부정한 자리에 있는 자기 백성을 정결한 자리로 끌어갈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모든 일을 이루었으니 우리는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제사장 나라의 백성은 제사장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신 예수님에게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침 받음으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 13:13-15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합니다.

 

 

영문 밖은 성 밖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버림받은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버림받은 그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성 안에서의 삶보다 예수님이 버림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구별이며 거룩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자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똑같이 사신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사셨습니다. 다르게 사신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신자 또한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세상과는 다른 삶의 정신이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핵심은 부정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가치를 둠으로써 내가 자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되는 길로 가는 것이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목적이 바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세상과 다른 사람으로 다르게 사는 신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부정한 죽음의 존재일 뿐입니다. 죽음의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존귀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인다 해도 세상에는 죽음만 있습니다. 하지만 초라하고 별 볼일 없이 보인다 해도 예수님께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신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화려함이 아니라 생명을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주어진 이유이며 신자가 보여야 할 믿음의 본입니다.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세상과 다른 길로 가는 자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올 한 해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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