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1.21 15:09

(112강) 왕의 정의와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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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5:9-12http://onlycross.net/videos/eze/eze-4509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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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

11.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하게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하고 에바도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할 것이며

12.세겔은 이십 게라니 이십 세겔과 이십오 세겔과 십오 세겔로 너희 마네가 되게 하라

 

<설교>

신앙은 생존이 아닌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보다는 생존의 문제에만 집착합니다. 생명을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생존에 힘이 되는 것을 원하며 그쪽으로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자연히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모든 관심사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고 생명의 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지 않았던 것은 생명의 문제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생존의 문제에만 매달리고 살아가는 현실에서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외쳤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피의 은혜와 부활이 생명이며 그 생명이 십자가로 증거 되는 것이기에 십자가 복음이 증거 되는 일에는 그 무엇도 양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여러분을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 받게 하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면 거기에 생존의 문제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추가하여 믿으십니까?

 

 

생존의 문제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야기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에게 현실은 먹고 사는 문제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이야기 또한 비현실적인 허망한 내용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사를 목사인 제가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현실에 대해서도 양보하지 않고 사도의 정신을 따라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도가 간 길을 가는 목사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러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뜻하신 길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관심을 생존이 아닌 생명에 두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목사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겔 44:28절에 보면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에게 기업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기업이 하나님이라면 제사장에게 힘은 땅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땅을 소유한 사람보다 힘 있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줄 존재가 제사장입니다. 땅에서의 생존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사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제사장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땅의 것을 기업으로 주셔서 세상이 부러워 할 힘 있는 자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기업이 되어 주셔서 세상의 소유와 상관없이 힘 있는 자로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 스스로 기업을 멸시합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삶이 참으로 초라합니다. 생명을 말하면서도 생명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언제나 세상을 기웃거리는 부끄러운 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현실이라는 점에 대해 먼저 깊이 자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 즉 왕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정의와 공의는 세상이 통치자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정의와 공의를 세워서 정직하고 깨끗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통치자가 할 일로 강조됩니다.

 

 

9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라고 말하는 것은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통치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치자가 어떻게 자신에게서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고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을까요? 인품이 훌륭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하지만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이미 포악과 겁탈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을 속여 빼앗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고 백성을 석여 빼앗는 것을 그침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통치자가 인품이 좋고 덕이 있다면 처음부터 포악과 겁탈을 행하지 않고 백성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통치자로서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렘 33:15-16절을 보면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분은 다윗에게서 난 공의로운 가지, 즉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만이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시는 왕이시고 정의와 공의가 실행됨으로 유다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는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왕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품과 덕이 있다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 정의와 공의가 왜 다윗에게서 난 공의로운 가지로만 가능할까요? 그것은 정의와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양보 없는 심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나 1:2절에서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고 거스르는 모든 죄에 대해 보복하십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보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보복하시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통치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수 있을까요? 통치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복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치자가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려면 자신을 심판해야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자신을 심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는 어떻게 정의와 공의를 실행했을까요?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이 스스로를 심판에 내어 놓으신 것이고 그것이 곧 정의와 공의를 실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구원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외에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왕은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왕들은 이미 백성들에게 포악과 겁탈을 행하고 속여 빼앗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일입니다. 당시 아합은 왕궁 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왕상 21;2)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나봇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기업을 팔 수 없다는 하나님의 규례를 내세워 거절하고 아합은 침상에 누워 식사까지 하지 않을 정도로 근심합니다. 아합의 근심을 안 아내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나봇을 백성들 가운데 높이 앉히고 불량자 두 사람을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증인으로 내세워서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그렇게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입니다.

 

 

모든 국가에는 법이 있습니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한 약속이며 질서입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언제나 강자에 의해서 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하지만 결코 평등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가 법이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법을 내세우며 포도원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는 제안도 법을 지키기 위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왕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고, 따라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왕의 권한이며 통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한 것입니다.

 

 

이처럼 왕은 자신이 왕이라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나라의 주인은 나다’는 사고방식이 깊이 박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의 “드린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쪽으로 향하여 서쪽 국경까지와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국경까지니 그 길이가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지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왕의 땅으로 일정 지역을 분배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소가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들의 땅이 있고 제사장들의 땅 만큼 북쪽으로 레위인들에게 주신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땅 남편에 이스라엘 족속에게 돌려진 땅이 있고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족속의 땅 동쪽과 서쪽에 왕의 땅을 분배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땅을 분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나중에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가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땅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땅 분배 이야기가 실제로 땅을 그렇게 분배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그들이 잊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면서 잊었던 것은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도 망각하게 되고 자기 소유를 확장하기 위해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가 피 흘리게 되고 나봇처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빼앗기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에게도 일정한 구역을 정해 주셨다는 것은 왕도 주인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인은 땅의 구역을 마음대로 정하여 분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왕은 땅을 분배 받으면서 자신이 주인이 아님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왕은 왕의 자리를 권력과 힘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심을 백성들에게 증거 하는 왕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이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는 것이고, 백성을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침으로 정의와 공의가 행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공의는 인간의 자발적 실천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으로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참된 왕은 다윗의 지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봇처럼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이 행세하고 참된 왕이 아니면서도 자신을 왕으로 간주하며 휘두르는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나봇과 같이 주인 행세하는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억울한 죽음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수가 우리에게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 죽은 자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산 자의 자리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면 십자가에 흘러넘치는 피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은 존재가 산자로 바뀐 복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복의 세계가 곧 충만과 만족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것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 없음을 아는 신자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와 공의의 실행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속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결국 보이는 세상으로 채우려고 발버둥 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속이는 저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0-12절의 내용 또한 왕의 정의와 공의가 우리 속에 실행됨으로 나타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벧전 2:9절에서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자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죽음에서 건져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행하심만 증거 하는 것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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