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2.04 16:20

(114강) 안식일과 초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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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6:1-8http://onlycross.net/videos/eze/eze-46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안뜰 동쪽을 향한 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초하루에도 열고

2.군주는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군주는 문 통로에서 예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3.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이 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

4.안식일에 군주가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라

5.그 소제는 숫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 씩이니라

6.초하루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어린 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할 것이며

7.또 소제를 준비하되 수송아지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숫양에도 밀가루 한 에바며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요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8.군주가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설교>

하나님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 근거는 엡 1:4절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여 우리를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고 이 작정하심이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로 존재하게 된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방식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면 그 증거는 인간의 모든 의와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신자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선택은 언약의 방식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이 현실로 세상에 드러나는 시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조로부터 시작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고 인간은 그 언약에 참여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곧 구원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신자 되게 하심으로 언약에 참여하게 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있었던 언약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알고 믿는 자는 결코 자신의 가능성과 의를 내세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신자입니다.

 

 

신 8: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떡을 위해 살고 떡을 위해 일합니다. 떡이 있어야 몸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을 위해서 좀 더 많은 떡을 소유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며 일합니다. 따라서 떡을 자기를 위한 열심과 수고로 이해한다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신의 열심과 수고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그들의 열심, 수고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매일매일 만나를 먹으면서 자신들을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알지 못한 인간에게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는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알게 된 신자가 부정하게 되는 것을 긍정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의와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곧 죄이고 인간은 죄의 영역에 갇힌 죽음의 존재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자신들의 의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단과 도구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과 초하루에 대해 말씀합니다. 초하루는 월삭을 말하는 것인데 매월 초하루에 제사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날은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명절을 포함하여 안식일과 월삭은 이스라엘이 어기면 안되는 중요한 절기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규례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대해서는 보다 더 철저했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대해서 목숨처럼 생각하고 지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집착과 생각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율법이 그들의 삶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이나 현재의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것은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킨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파멸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좀 더 철저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소홀해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특징은 단회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도 절기도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명절이라고 하는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은 매년 반복되어야 하고 본문에서 말하는 안식일도 매주 반복 되는 날이며 초하루에 지켜야 하는 월삭 또한 매월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반복해서 지키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지키고 행하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의롭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임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의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취지인 것입니다.

 

 

히 10:3,4절을 보면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율법의 제사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생각하라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치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사가 반복되는 것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안식일에 군주가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라 그 소제는 숫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 씩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민 28:9,10절을 보면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둘과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이는 매 안식일의 번제라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민수기보다는 에스겔에서의 안식일의 번제가 제물의 규모나 설명이 좀 더 보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초하루의 규례는 민수기의 제물의 규모보다 작습니다. 본문에서는 초하루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어린 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드리라고 말씀하지만 민수기에서는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차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느 규례를 따라 안식일과 초하루 제사를 드려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느 규례를 따라 제사한다 해도 그들의 제사로는 죄가 용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린다 해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뿐입니다.

 

 

제사 규례로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소 몇 마리가 아니라 천 마리, 만 마리를 바치고 그 피를 뿌린다 해도 죄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안식일과 초하루 제사가 또 다시 이스라엘 민족 대대로 성실하게 실행된다 해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로 인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에스겔에게 새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솔로몬 성전에서 행해지던 제사와 이스라엘이 지켜오던 명절과 함께 안식일과 초하루에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새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가 대대로 반복된다 해도 죄에 대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자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참된 성전이심을 믿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히 7:27절을 보면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고 말하고, 10:18절에서는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드리는 영원한 제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히 10: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9: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되었다고 하면서 매주 반복되는 주일이라는 날이 죄와 복과 구원에 대해 어떤 효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주일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신앙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죄가 용서되고 복을 받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신자로서 주일은 지켜야 하는 날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안식일과 초하루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를 이해한다면 매주 주일이라는 날을 반복해서 맞이하고 그 날이 되면 어김없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와 찬송과 헌금을 하면서 그 어떤 행위로도 죄가 용서 될 수 없고 복을 받아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된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물 또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그로 인해 자신들을 축복하시고 지켜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제사에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그들의 생각 또한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 또한 매 주일 반복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배와 헌금 등의 정성을 기쁘게 받으시고 복을 주시며 자신들을 지켜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결말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의 결국을 보지 못하는 것이 지혜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1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안뜰 동쪽을 향한 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초하루에도 열고”라고 말씀합니다.

 

 

안뜰 동쪽을 향한 문은 하나님이 닫으시고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동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이 계신 성소가 있습니다. 그 문을 닫으시고 나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지 않으시고 인간 또한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닫힌 문이 안식일과 초하루에는 열립니다. 안식일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음을 의미하고 초하루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세우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있게 되는 날입니다(출 40:2). 성막은 인간의 어떤 종교적 행위로도 거룩해질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거룩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축복임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안식일과 초하루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셨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닫으신 문을 안시일과 초하루에 열게 하신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닫게 하신 것은 인간이 일하는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받으시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겔 44:2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2,3절을 보면 “군주는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군주는 문 통로에서 예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이 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백성은 문 입구에서 여호와 앞에 예배하고 군주 또한 문 통로에서 예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무엇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때 내가 행한 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고 될 수도 없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언약의 방식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믿는 것 또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와 가능성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믿는 것 또한 불가능한 우리에게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믿음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과 그 능력은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으로 드러나고 증거 됩니다. 이 증거가 있는 자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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