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2.11 18:49

(115강) 문에서 문으로

조회 수 192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46:9-12http://onlycross.net/videos/eze/eze-4609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백성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10.군주가 무리 가운데에 있어서 그들이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이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

11.명절과 성회 때에 그 소제는 수송아지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바요 숫양 한 마리에도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12.만일 군주가 자원하여 번제를 준비하거나 혹은 자원하여 감사제를 준비하여 나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그를 위하여 동쪽을 향한 문을 열고 그가 번제와 감사제를 안식일에 드림 같이 드리고 밖으로 나갈지며 나간 후에 문을 닫을지니라

 

 

<설교>

현대 사회를 가리켜 ‘성공시대’라고 말합니다.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최고가 되기 위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자가 되는 것이 곧 성공이고, 능력이 없는 것을 패배자로 간주합니다. 능력이 뛰어날수록 영웅으로 대접받는 세상인 것입니다.

 

 

언젠가 T.V의 모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자가 키 작은 남자를 ‘루저’(loser, 패배자)로 지칭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여자의 말로는 남자의 키가 180센티미터 이하면 루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언으로 인해서 인터넷에서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사실 키 큰 사람을 우월하게 여기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결국 키가 크다는 것이 하나의 능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타인에 비해 우월한 모든 것을 능력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로 부각되기 위해 힘쓰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통용될 수 없는 사고방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를 생각해 보면 현대 교회가 믿음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생명으로 의지하며 참된 진리의 길로 가기를 힘쓰는지 아니면 믿음은 명목일 뿐이고 실제로는 좀 더 우월한 교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타인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월하다는 것이 능력으로 통용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능력자는 교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우월한 자, 능력자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을 우리의 성공을 도와주기 일하시는 분으로 말해서도 안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신자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복은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 지켜주심, 은혜와 사랑, 이 모든 것 또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둔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믿음의 세계에 대한 곡해만 남을 뿐입니다.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을 때 능력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으로만 되는 것을 능력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은 죄인이고 실패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이 되고 또한 실감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세계에 속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이렇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을 좇고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두고 보이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믿음 밖에 있는 모습이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의 능력, 이 모든 것을 보이는 것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면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백성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정한 절기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안식일과 초하루(월삭)을 포함하여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하나님이 정한 절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한 절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제사이고, 또 하나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안식일 규례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절기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일해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는 실패자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오게 하실까요? 이스라엘과 똑같이 실패자로 나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기를 정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절기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셨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실패자인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 실패자인 그들에게 동행해 주고 계신다는 것, 실패자인 그들을 도우시고 지켜주고 계신다는 것이 절기를 통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매년 반복되는 절기를 지켰으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절기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규례에 순종하는 것이고, 규례에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기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절기는 단지 매년 반복되는 행사의 취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출 23:14-17절에 보면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기를 지키라고 하시면서 각각의 절기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무교병의 절기를 통해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맥추절을 지킬 때는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땅에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수장절을 지키면서는 자신들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존재하게 됨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매년 절기를 반복하고 지키면서도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절기를 지킨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고 결국 절기를 지키면서도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호 2:11절의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모든 명절, 즉 절기를 폐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키라고 세우신 것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절기를 폐하여 무너뜨릴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모든 명절을 폐하신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명절을 폐하여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명절로 인해 드러난 자신들의 잘못됨을 모른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외치는 참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에서 멸망할 무렵까지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렇게 보면 절기를 폐하시겠다는 말씀이 북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실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폐하시겠다고 한 절기의 문제를 무엇 때문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새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느냐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정한 절기에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남문과 북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감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문으로 들어올 때의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성전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절기를 지키면서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절기를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사를 드리고 규례를 지키는 수준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지금의 교회의 형편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역시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뜻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 또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복을 누리고자 하는 취지로 신앙을 이해합니다. 이것이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 세계는 다른 세계를 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며 원하는 것을 이루는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신앙세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됨으로 자신이 실패자인 것을 알게 되고 멸망이 당연한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기쁨과 감사를 배우게 되는 것이 신앙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 세계로 이끄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본문과 같은 성경을 보면서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안식일과 초하루에 대한 규례도 물론이고 성전과 연관되어 등장하는 제사에 대한 규례들 모두가 아주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제물도 제사 드리는 자가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대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만 보이는 규례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제시하신 말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에 좋은 것을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이것을 행하고 이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만 자기 백성을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 들어와 제사하고 제물을 바칠 때는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 바쳤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와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자신과 들어간 자신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 바쳤으니까 복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는 것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들어간 문으로 도로 나온 것이 됩니다.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란 뜻입니다. 죽은 자가 제물의 희생으로 죽음에서 건짐 받은 자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세계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구원의 세계를 세상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한 좋은 것을 들고 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방식을 고집하면서 말씀을 거부하는 종교의 모습입니다.

 

 

10절에 보면 “군주가 무리 가운데에 있어서 그들이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이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만일 군주가 자원하여 번제를 준비하거나 혹은 자원하여 감사제를 준비하여 나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그를 위하여 동쪽을 향한 문을 열고 그가 번제와 감사제를 안식일에 드림 같이 드리고 밖으로 나갈지며 나간 후에 문을 닫을지니라”고 말합니다.

 

 

군주는 백성을 대표합니다. 그 군주가 자원하여 번제나 감사제를 드릴 때 동쪽을 향한 문이 열립니다. 백성은 동쪽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동쪽 문은 하나님이 들어가신 문이고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무엇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없는 죄인이며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군주가 그들 가운데 있고 자원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때 동쪽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들에게 함께 한 군주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십자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행함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고 실패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자원하여 자기 몸을 제물 삼아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어떤 세계를 보십니까? 예수 안에서 보게 되는 세상과 다른 세계가 없다면 결국 예수를 말하면서도 기준의 세상 방식 그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자기 행함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우월을 드러내려고 할 뿐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산 자가 된 은혜의 세계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7 에스겔 (126강) 여호와 삼마 신윤식 2017.04.29 2179
126 에스겔 (125강) 속된 땅 신윤식 2017.04.22 1853
125 에스겔 (124강) 레위 사람의 몫 신윤식 2017.04.15 1923
124 에스겔 (123강) 거룩한 예물 신윤식 2017.04.08 1780
123 에스겔 (122강) 중앙의 성소 신윤식 2017.04.01 1895
122 에스겔 (121강) 경계선 신윤식 2017.03.25 1818
121 에스겔 (120강) 기업 분배 신윤식 2017.03.18 1924
120 에스겔 (119강) 살리는 물 신윤식 2017.03.11 1983
119 에스겔 (118강) 성전의 물 신윤식 2017.03.04 2076
118 에스겔 (117강) 삶는 부엌 신윤식 2017.02.25 2063
117 에스겔 (116강) 군주의 기업 신윤식 2017.02.18 1933
» 에스겔 (115강) 문에서 문으로 신윤식 2017.02.11 1921
115 에스겔 (114강) 안식일과 초하루 신윤식 2017.02.04 2352
114 에스겔 (113강) 명절을 지키라 신윤식 2017.01.28 1978
113 에스겔 (112강) 왕의 정의와 공의 신윤식 2017.01.21 2141
112 에스겔 (111강) 거룩한 구역 신윤식 2017.01.14 2032
111 에스겔 (110강) 제사장 기업 신윤식 2017.01.07 2250
110 에스겔 (109강) 부정과 정결 신윤식 2016.12.31 2154
109 에스겔 (108강) 제사장 직무 신윤식 2016.12.24 2355
108 에스겔 (107강) 레위인의 직무 신윤식 2016.12.17 229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 7 Nex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