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2.18 16:31

(116강) 군주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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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6:13-18http://onlycross.net/videos/eze/eze-46131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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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아침마다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14.또 아침마다 그것과 함께 드릴 소제를 갖추되 곧 밀가루 육분의 일 에바와 기름 삼분의 일 힌을 섞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규례로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릴 소제라

15.이같이 아침마다 그 어린 양과 밀가루와 기름을 준비하여 항상 드리는 번제물로 삼을지니라

1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군주가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17.군주가 만일 그 기업을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군주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군주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라

18.군주는 백성의 기업을 빼앗아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지니 군주가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라 백성이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설교>

세상은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상합니다. 현재가 좋으면 미래도 좋고 현재가 나쁘면 미래도 나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문제도 동일한 시각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의 신앙생활의 여부에 따라 미래의 결과가 다르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신앙이 좋으면 나중에도 복 받고 잘 될 것이고 천국에 가서도 큰 상을 받을 것이며, 반대로 현재의 신앙이 좋지 못하면 나중의 결과도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의 내용과 상식으로 견고하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인식에 지나지 않으며 불교가 가르치는 업보(業報 : 행위의 결과로서 받는 것)의 개념에서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행위의 결과로 받는 것이 있음을 성경이 증거 하지만 그것은 죽음, 즉 심판일 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현재의 행위는 죽음의 원인인 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된 미래를 현재를 보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현재의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구원을 받고 천국에서 타인보다 큰 상을 받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에 대한 그 같은 이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과 평강이 아닌 실천과 보상의 수준으로 전락시킬 뿐이며, 평생을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죽음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노력으로도 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고 신앙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해도 그것으로 죄가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고, 예수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덮으셨음을 믿음으로 죄 없는 자로 여김 받는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성경이 증거 하는 신앙 세계이기 때문에 참된 신앙은 우리가 죄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해야 하거나 복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은 결국 의무를 준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그러한 시각으로 이해했습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준수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의무를 다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방식의 이해가 현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개의 교회가 십일조를 신자가 행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하면서 그 의무를 성실히 실천했을 때 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고 가르치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다는 복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죽음에 붙들려 있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한 채 십일조라는 행함의 실천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기독교라 이름 하는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자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며 행동하게 된 이 관계의 비밀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 8:17절을 보면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증거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이 신분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에 실천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른 이의 상속과 차별되는 것이 없습니다. 애당초 상속자가 된 이유가 우리의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17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군주가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군주가 만일 그 기업을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군주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군주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군주의 기업은 아들이 이어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군주의 아들이 아닌 자는 누구도 군주로부터 기업을 받을 수 없고 그 기업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군주의 기업을 받을 자격은 군주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실천했는지에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군주가 주는 기업은 군주의 것입니다. 군주가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고 군주는 오직 아들에게만 줄 뿐입니다. 이것을 반복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 우리의 군주, 즉 하나님께 속한 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주지하는 것이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모든 정한 절기에 제사를 드립니다. 수많은 제물을 바치며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에 제사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허용된 문은 북문과 남문일 뿐 하나님이 들어가신 동문은 허용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이 모든 정성을 동원하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친다 해도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어떤 실천과 행함으로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 갈 수 없는 저주의 존재가 그들의 현실이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제사를 행하면서 자신의 실체에 대해 눈을 뜨기 보다는 자신들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고 지켜 주신다는 헛된 착각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사하기 전과 제사한 후가 전혀 달라진 바 없는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제사를 행하면 자신들만의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교회가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며 심각한 현실입니다. 성경을 실천함으로써 특별한 혜택과 보상이 부여된다고 믿지만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며 종교의 길을 걷는 것일 뿐임을 눈치 채지 못한 것입니다.

 

 

13-15절은 매일 드리는 제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침마다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고 역시 매일 아침 밀가루와 기름을 준비하여 번제와 함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 29:38-39절에서는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라고 말씀합니다.

 

 

매일 어린양 두 마리를 아침과 저녁으로 한 마리씩 드리라는 것이며 여기에 밀가루와 기름과 포도주를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어린양을 드려 제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상의 정성과 열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제사하는 자에게도 동문은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군주의 선물은 아들에게 주어 아들의 기업이 되고 아들의 자손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지 열심히 제사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나 보상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열심을 원인으로 하여 하나님께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와 제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사는 거룩하지 않고 구원 받지 못할 자의 더러움을 거룩한 제물이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거룩한 자로 여기시고 구원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합니다. 이 같은 제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인간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의미임을 안다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더러운 자신을 거룩한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귀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결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보다 우월한 미래의 자기 존재를 기대하고 목적하면서 현재의 신앙생활에 충실해지고자 한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관한 미래를 위한 자기 투자라는 개념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자리해야 하는 것은 신앙의 행동과 실천이 있는 자신이 아니라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거룩한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거룩하지 못한 더러운 존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가장 존귀한 선물로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코 본인이 우월해지고 가치 있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군주의 기업은 아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군주가 기업을 종에게 선물로 주는 경우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지만 종에게 준 선물은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만 이르고 그 후에는 다시 군주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군주의 기업은 아들이 이어 받기 때문입니다.

 

 

종에게 준 군주의 선물이 희년까지만 이른다는 것은 군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해도 종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니라 종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군주에게 받은 선물로 열심히 일해서 많은 것을 남겼다 해도 희년이 되면 모두 군주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희년은 자신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 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에서부터 빈손으로 출발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기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희년을 통해서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년이 되면 사고팔고 했던 모든 것들이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군주로부터 선물을 받게 되고 그 선물이 영원한 기업으로 이어지는 것은 군주의 아들이라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 관계를 우리에게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것을 갈 4:4-5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죄 아래 나신 이유가 죄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문을 얻은 자이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롬 8:15).

 

 

아들은 오직 아들이라는 신분에 의해서 군주로부터 선물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영원한 기업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속량된 신자라면 신자에게 가장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종노릇하고 있던 자신을 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피 흘려 죽으신 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군주는 백성의 기업을 빼앗아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지니 군주가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라 백성이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군주는 백성의 기업을 빼앗아 자기 아들에게 기업을 줍니다. 하지만 참된 군주는 백성의 기업을 빼앗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산업으로만 아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참된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열심과 헌신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킴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로 인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발상은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는 바울의 책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종이었던 우리를 아들 되게 하신 은혜에 초점을 두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살아가는 형편에 불평을 하지만 현재가 아무리 부요하다 해도 그 결국은 저주일 뿐입니다. 저주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결국임을 안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의 가치와 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지금 당장은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될 수는 있어도 미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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