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2.25 17:36

(117강) 삶는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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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6:19-24http://onlycross.net/videos/eze/eze-4619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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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 곁 통행구를 통하여 북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쪽에 한 처소가 있더라

20.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제물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21.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를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22.뜰의 네 구석 안에는 집이 있으니 길이는 마흔 척이요 너비는 서른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같은 크기며

23.그 작은 네 뜰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방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24.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설교>

‘믿음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가장 쉽게 간단히 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 믿음을 너무 쉽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고 간단한 믿음을 우리의 힘으로는 안된다고 말하면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일이 쉽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일이 쉽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믿음을 누군가의 권유를 받고 ‘이제부터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어보자’라고 결심만 하면 되는 수준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증거 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신뢰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확정하신 나중의 모든 일에 대해서까지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사 그 일로 인해서 자신의 육신에 어떤 손해와 아픔이 주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고 간단하다고 생각되는 믿음에는 이렇게 깊고 오묘한 해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우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초월자의 도움을 얻고자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는 믿음은 인간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이 납득이 됩니다. 구원, 복, 은혜, 사랑 등등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으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위해 베풀어지는 것으로 설명되기에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참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과 무관합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배워가면서 그 모든 것을 믿는 것이기에 자연히 참된 믿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신은 믿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 아닌 것, 믿음의 사람과 믿음의 사람이 아닌 것은 이렇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떤 믿음에 익숙해져 살아갈까요? 당연히 인간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믿음 아닌 믿음에 익숙해진 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인간을 위한 종교에 매몰되어 살다가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믿음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사실은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나의 결심과 뜻과 의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으려면 ‘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물음을 가지고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에스겔이 본 성전의 구조에 대한 것인데 먼저 19절을 보면 천사가 에스겔을 데리고 문 곁 통행구를 통하여 북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 통행구는 42:9절에서 언급한 바깥뜰에서 들어가는 통행구를 말하는 것이고, 북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남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도 있다는 뜻입니다. 즉 성소와 지성소 양편에 거룩한 방이 있는 구조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거룩한 방 뒤 서쪽에 한 처소가 있습니다. 이 처소는 20절을 보면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 제물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굽는 곳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제사장이 사용하는 부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처소도 북쪽을 향한 곳과 남쪽을 향한 곳, 두 곳에 있습니다.

 

 

제물을 삶는 부엌은 여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21절을 보면 에스겔은 다시 바깥뜰로 나가서 뜰 네 구석에 또 뜰이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뜰의 네 구석에 각기 동일한 크기의 집을 보게 됩니다.

 

 

23절을 보게 되면 이 집은 부엌이고 24절의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는 내용을 보면, 이 부엌 역시 제물을 삶기 위한 곳이고 그 제물은 백성의 제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부엌과 다른 점은 네 구석에 있는 부엌은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들의 부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는 제사장의 부엌과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들의 부엌이 있고 그 용도는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삶기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의 구조는 이스라엘이 장차 실제로 건축해야 할 구조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의 구조가 세밀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손이 필요 없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완성되어진 참된 성전에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향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되어 생활하는 이스라엘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성전일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신들의 주요한 생활이었습니다.

 

 

겔 8:16절을 보면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포로 되기 전에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주변의 잘 사는 이방 나라들처럼 부요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이 관심의 전부였을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문에서 아예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태양에게 예배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포로 된 상황에서 하나님께 관심을 둔다는 것은 도무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설사 하나님께 관심을 둔다 해도 하루 속히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 땅으로 돌아가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찾는 수준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드러내신 뜻은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되게 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에 제물을 삶는 부엌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사장 부엌은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 제물을 삶고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로 말합니다. 이상한 것은 제사장의 부엌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뜰 네 구석에도 제물을 삶는 처소인 부엌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제사장의 제물을 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의 부엌이 따로 있는 것은 성전에서 수고하는 제사장을 특별 대우하는 것일까요?

 

 

출 29:31-33절에 보면 “너는 위임식 숫양을 가져다가 거룩한 곳에서 그 고기를 삶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문에서 그 숫양의 고기와 광주리에 있는 떡을 먹을지라 그들은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 쓰는 것을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 그것이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제사장이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신 것이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제물을 제사장이 먹음으로써 제사장 역시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함부로 먹을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만약 타인이 함부로 제사장의 제물을 먹는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거룩해지고자 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제물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로 나가면 백성들은 제사장이 하나님께 바친 성물을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먹으면 자신도 거룩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제사장이 가지고 나온 성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밀어 넣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부엌을 별도로 만들어 제물을 삶고 굽게 하는 것입니다.

 

 

삼상 2: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 사환을 보내어 갈고리로 가마를 찔러 걸려 나오는 것을 자기 것으로 가졌습니다.

 

 

또한 제물의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제사장이 삶을 것을 원하지 않고 날 것을 원한다고 하면서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약 기름을 태운 후에 원하는 것을 가지라고 하면 막무가내로 지금 내지 않으면 억지로 빼앗겠다고 하면 횡포를 부렸습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7)고 말하기도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두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제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즉 자신들에게는 제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물이 하나님과 연관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로만 생각한 것이고 제사 또한 그 고기가 수중에 들어오는 수단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처럼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이 들고 나온 고기를 자신들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그것을 먹음으로 복된 결과가 주어질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과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제사장도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으로 인해 거룩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제사장의 일을 하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제사장도 제물의 피를 자신에게 바르기 전에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사장 역시 거룩한 자가 아니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불의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의한 존재가 어떻게 거룩한 자가 되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보여주시는 분으로 오신 분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가를 예수님에게서 보게 되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거룩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음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제사장은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일반 백성과는 다르게 기업이 없고, 일반인과는 다른 옷을 입으며 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제물을 먹을 수 있도록 구별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제사장 직이 특별하고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구별을 통하여 세상과는 다르게 존재해야 하는 거룩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장의 존재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제사장으로서의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신을 일반 백성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스스로를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목사가 목사로서의 일에 실패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스스로를 존중함으로 해서 정작 우리로부터 존중받아야 하는 하나님은 멸시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뜰의 네 구석에도 부엌이 있고 그 부엌에서는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삶습니다. 백성의 제물을 삶는다는 것은 백성과 함께 삶은 제물을 먹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사장의 부엌에서 삶은 제물과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동일한 제물이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의 부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누구도 자기 의사와 행위에 의해 거룩에 참여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관심으로만 살아갑니다. 이 관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내용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자 하시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까?’라는 물음은 필요 없습니다. 대신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면 돌아오는 유익에 초점을 둘 뿐입니다.마치 물품의 효능을 광고하듯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여러 가지로 나열하여 막연히 ‘하나님을 믿으면 잘된다’는 허상에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며 이 거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거룩의 가능성이 예수님의 피에만 있음을 믿는 그들이 예수님의 피에 의해 거룩해진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믿게 하신 이유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의 가능성이 없는 불의한 우리를 어떻게 거룩의 세계에 참여하게 하셨는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까지 확증해 놓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떤 일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이 이루실 결말을 내다보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 됨은 이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속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흘러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피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붙들어 놓는다는 사실이 장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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