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3.04 16:14

(118강) 성전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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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7: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4701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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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2.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3.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설교>

솔로몬의 성전과 에스겔의 성전을 비교하면 크기는 물론이고 구조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솔로몬 성전에는 없는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성전에서 나오는 물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초점을 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수많은 제사가 행해졌고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행하면서 그 모든 행위와 실천들이 구원이 되고 복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제사야 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성전은 구원과 복을 받기 위한 장소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는 구원의 조건과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신앙행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서 제사하는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을 복 주신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기독교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수정되지 않는 한 누구도 구원의 길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알아야 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으며, 구원의 이유 또한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구원의 조건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거나 구원의 근거를 우리에게 두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될 뿐입니다.

 

 

사 43:21절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 43:25절에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48:11절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애당초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도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일이며 이스라엘에 대해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사 43:2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목적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누구나 찬송을 쉽고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찬송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이 자신의 이해와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바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을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찬송의 이유와 조건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이해와 기대에서 벗어나는 삶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찬송하다가도 언제든 원망과 불평으로 바뀔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찬송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찬송하게 할 백성을 지으시고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시고 부르신 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의 이유와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면 찬송의 이유와 근거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찬송의 이유와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행한 일에서 이유와 조건과 자격을 찾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에게서 이유와 조건과 근거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불안감이 자리합니다. 이 불안감은 ‘하나님은 나 같은 자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심과 함께 자책에 빠져 들게 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구원의 이유와 근거와 조건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은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어려워합니다. 구원의 조건이 우리의 행함과는 상관없다 할지라도 구원의 목적과 뜻은 행함에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인데,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고 이해한다면 구원의 이유와 조건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인간이 책임질 수 없고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구원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곧 찬송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이 같은 은혜와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을 근거로 하고 자신에게 이유를 둔 은혜와 사랑에만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행함에 하나님의 뜻을 두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지으셨고 또한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구원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스스로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신앙적 행동을 했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갈 3:10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율법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준입니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 만족해하는 몇 가지 행동과 실천으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동과 실천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거나 복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저주 아래 있다는 증거로 작용될 뿐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신앙적 행위로 간주 되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며 복을 받게 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물이 나와 흐르는 것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을 보면 천사가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가면서 천 척, 즉 500미터 정도를 측량하고 에스겔에게 그 물을 건너게 하고 물이 발목에 오르더라고 말합니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물을 건너게 했을 때는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건너게 하자 물이 허리에 오를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측량했을 때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됩니다.

 

 

그리고 8절의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는 내용을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온 이 물은 아라바로 내려가 바다에 이르러 바다의 물을 살리게 됩니다. 이 바다가 바로 사해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죽은 바다로 일컬어지는 사해 바다를 살리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성전의 물은 생명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내용인 것이고 그 생명수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게 되면 참으로 복음적인 해석으로 인정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으로 오신 것은 사실이고, 죽음의 세계에 생명수가 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 이런 경우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살리는 생명수의 역할을 합시다’라는 생각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제사하면서 그것이 자신들에게 복이 될 것으로 여겼던 이스라엘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을 살리는 생명수의 역할을 하자고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 세상에게 감동을 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그러한 일을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에 대해 만족하면서 구원과 복의 이유와 근거와 자격을 자신에게서 찾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나오지 않는 물이 에스겔 성전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바다로 들어가 바다의 물을 살리는 생명의 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사람의 손으로 행해지는 제사는 죄를 완전히 해결해 버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번씩 제사하면서 계속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하루에 두 번 제사하는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도 정작 죄를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의 한계입니다.

 

 

오직 에스겔 성전에서 하나님에 의해 행해지는 제사만이 완전한 제사가 되어 죄가 용서됩니다. 이것을 물이 흐르고 그 물이 죽음의 바다로 들어가 되살리는 것으로 보여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은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성전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계 22:1-2절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거룩의 세계입니다. 거룩의 세계로부터 나온 생명이 죽음의 세계로 흘러 들어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세상에서 거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것이 곧 거룩의 세계에 참여되는 것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나 구원 받은 자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뭔가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를 지우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일 뿐임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처음에는 발목에 오를 정도였다가 나중에는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의 강이 됩니다.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라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강을 스스로의 힘과 열심으로 건너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의 오해이고 잘못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제사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거룩한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음을 생각하게 되면 생명의 근원은 십자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늘의 거룩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저주의 세상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처럼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 두지 않습니다.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얻는 것에 더 심취해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존귀한 것은 세상에 근원을 둔 모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근원으로 하여 흘러나오는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신다는 것보다는 세상 영광이 더 크고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을 우리 마음으로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짐하고 마음을 하늘의 생명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도 우리 마음에 박혀 있는 세상을 잘라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감하는 것은 죽음의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죽음의 세계에 끌리는 마음을 잘라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내가 곧 죽음의 존재임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우리가 목적하는 세상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가치 있는 생명의 세계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알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이며 신비스런 사건임을 알게 됨을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아시고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인생을 산다는 확신이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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