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3.11 16:58

(119강) 살리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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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7:6-12http://onlycross.net/videos/eze/eze-4706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설교>

신앙생활을 자기 열심과 의지의 문제로 여긴다면 그것은 종교가 됩니다. 종교란 본인의 열심과 의지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찾아가고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말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말에 이미 본인의 열심과 의지로 신앙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자칫 신자로서 그 어떤 열심과 의지가 있으면 안된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과 무기력을 조장하는 잘못된 말로 오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열심과 의지라는 말에 대한 이해입니다.

 

 

요 2:17절에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면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시 69:9절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는 말을 기억한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성전에서의 제사를 위해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것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열심은 오늘날 교회에서의 열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인이 신앙의 행위로 자부하는 열심이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맹목적으로 열심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성령에 의한 참된 열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주지해야 합니다.

 

 

신앙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이 아닌 성령의 주도적인 활동에 의해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신자에게서는 그 어떤 결단과 의지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마음의 결단과 의지가 우리로 하여금 주를 믿는 자로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주도 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 신자는 자신의 결단이나 의지, 열심 그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십자가의 은혜가 감사로 다가오고 그것이 평안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다만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만 높이고 자랑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 붙들린 신자입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 안은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와 의와 생명으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 안으로 여러분이 부름 받았고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무엇을 가리켜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실감할 수 없으며,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세계가 예수 안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의로 완전하고 충만한 세계 안에서 우리의 의지와 열심으로 해야 할 것, 이루어야 할 것이 과연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 안의 신비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 안의 신비에 관심을 두지 않기에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누리게 된 놀라운 복을 알지 못하고 항상 세상을 바라보며 아쉬워만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흐릅니다. 그리고 그 물이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자 그 물에 의해서 바다의 물이 되살아납니다.

 

 

이것을 8절에서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다의 물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본래는 살아있는 물이었으나 무슨 연유인지 죽은 물이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죽은 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되는 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물은 바닷물만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9절에서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이 강물이 이르는 곳의 모든 것이 사는 생명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솔로몬 성전에서는 없는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인간의 열심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끊이지 않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 생명의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열심에는 생명의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기를 원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성전이라는 건물은 무너지고 없는 상태이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의 마음에는 여전히 그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제사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잘 살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성전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성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손으로 다시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들 손으로 행하는 제사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성전에서 흘러나옵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전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참된 성전을 주심으로 생명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며 십자가 사건입니다.

 

 

히 9:11-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루어진 일인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손으로 행하는 열심을 믿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행하는 일에 가치를 두거나 그것을 신앙의 행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의 열심히 자신을 살게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솔로몬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이시는 것으로 나타내십니다.

 

 

12절에 보시면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성소를 통해서 나오는 물에 의해서 과실나무가 자라고 새 열매를 맺고 잎사귀는 치료하는 약 재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이 내용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 문제와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해야 할까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에서 흐르는 물은 요 7:37절에서 말하는 생수의 강으로 이해할 수 있고, 생수의 강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요 7:38) 본문은 장차 신자가 받을 성령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로 인해 죽은 바다가 되살아나고 과실나무가 자라고 새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약 재료가 되는 모든 일들이 성령 받은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행하는 율법에 메이지 않고 성령의 법에 메임으로써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성령으로 사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롬 3:19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바와 같이 율법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이 마치 저주 받은 바다, 죽음의 바다를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롬 7: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게 하고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열심과 의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실천을 하고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성전 종교에 메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되는 것일까요? 그것 역시 열매 맺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일 뿐 하나님을 위한 열매라는 사실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이라면 자신에게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하기는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이 성령을 받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으로 확인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메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자유하지 못하고 여전히 육신의 법에 메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예수님께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주신 은혜를 알게 하시고 그 은혜를 받은 자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감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흐르는 물로 바다의 물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면 되살아난 바다의 물은 ‘다시 살았으니 물고기가 많이 사는 바다가 되도록 힘써야지’라는 결단을 하는 것이 다시 살게 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일까요? 바다의 물이 되살아났다면 되살아난 물로 존재하면 됩니다. 이것을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은혜 받은 자답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진펄과 개펄은 물이 흘러 들어오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소금 땅이 된다는 것은 과실나무가 자랄 수 없음을 말하고 따라서 당연히 새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는 성전의 물의 흘러 들어옴으로 맺어집니다. 성전의 물이 이른다면 그 물에 의해서 열매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히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생물이 살고 과실나무가 자라고 새 열매를 맺는 모든 일은 성전의 물이 이르렀을 나타나는 생명의 현상들이지 물이 이르는 곳에 존재하는 생물이나 나무의 결단이나 의지, 열심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서 흐르는 물로 인한 생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율법적 행위에 메일 이유가 없는 것이고 스스로 열매라고 자부하는 것들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거나 우월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은 예수를 말하되 예수 밖에 있고, 성령을 말하되 진펄과 개펄처럼 소금 땅처럼 행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기쁨의 이유이고 전부이기 때문에 풍성한 열매가 소출이 없다 해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상실되지 않는다는 이것이 진정한 열매이며 갈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라는 사명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기 위해 시도하는 우리의 열심과 노력은 성령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조차도 성령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는 연결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누리는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에게는 신랑이신 예수님이 만족이고 충만이며 부요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아쉬워 할 것이 없는 세계를 살게 됩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내 힘과 열심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사망이 없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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