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3.18 17:36

(120강) 기업 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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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7:13-23http://onlycross.net/videos/eze/eze-4713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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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경계선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몫이니라

14.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15.이 땅 경계선은 이러하니라 북쪽은 대해에서 헤들론 길을 거쳐 스닷 어귀까지니

16.곧 하맛과 브로다며 다메섹 경계선과 하맛 경계선 사이에 있는 시브라임과 하우란 경계선 곁에 있는 하셀핫디곤이라

17.그 경계선이 바닷가에서부터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요 그 경계선이 또 북쪽 끝에 있는 하맛 경계선에 이르렀나니 이는 그 북쪽이요

18.동쪽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 강이니 북쪽 경계선에서부터 동쪽 바다까지 측량하라 이는 그 동쪽이요

19.남쪽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봇 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는 그 남쪽이요

20.서쪽은 대해라 남쪽 경계선에서부터 맞은쪽 하맛 어귀까지 이르나니 이는 그 서쪽이니라

21.그런즉 너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대로 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라

22.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23.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사람에게는 소유욕과 함께 자기 소유에 대한 보호본능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 자신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해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소유하고 싶어 하고, 소유하게 된 것은 지키고자 하는 강한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본능에는 소유한 물건을 지키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물건의 가치도 포함됩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 소유의 가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그것을 마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비난처럼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유에 대한 보호본능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호본능은 믿음에 대해서도 드러납니다. 누군가가 자기 믿음에 대해 잘못됨을 제기하면 자신을 비난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를 내며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믿음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이 소유에 대한 보호본능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것은 믿음을 자기 소유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말하는 사람 역시 자기 믿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 대해 마치 자기 소유에 대해 비난을 받는 것처럼 반응한다면 그 역시 믿음을 자기 소유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타인도 가치 있게 여겨주기를 바라고, 그 사람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자기편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내용에서는 분리되어 있는 오류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이 부패한 우리의 본질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는 ‘나의 것’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내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의 주인은 사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기 주제를 알지 못하고 주인 행세하면서 자기 것을 확보하는데 주력한 채 살아갑니다. 인생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기를 위한 인생으로만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기 인생을 위한 소유욕과 함께 인생에 대한 보호 본능이 작동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라는 말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죽은 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세계에 생명의 물이 흘러 들어오고 그 물이 강이 되어 강물이 이르는 각처의 모든 것이 살게 되고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고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지 않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게 됩니다(겔 47:12).

 

 

죽음에서 살리는 물, 즉 생명의 물은 성소를 통하여 나옵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에서 나온 물이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옴으로 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성소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렸다는 것은 생명의 물이 누구를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작정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믿음, 구원, 생명, 그 어느 것 하나도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모든 것이 우리의 힘이나 의지,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혜택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을 자신이 지키고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앙의 기준을 자신이 세워 놓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모습이 자기 생각에 미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내가 이래 가지고 천국 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자리하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바울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해 의심하고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붙들려 인도 받고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이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이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점에 대해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성소에서 나오는 물이 흐르는 땅에서는 새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기존의 땅과 다른 새 땅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신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인가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땅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기업으로 나눠주시는 내용인데 14절을 보면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공평한 분배가 가능할까요? 15절부터 보면 기업으로 분배할 땅의 경계를 말씀하는데 실제로 땅을 분배하기 위해 경계를 정한다면 모든 경계가 동일한 면적으로 정해질 수는 없습니다. 어느 지역은 크고 어느 지역은 작을 수 있습니다.

 

 

설령 동일한 면적의 크기로 경계가 정해졌다 해도 모든 땅의 환경과 형편이 동일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곳은 목축을 하고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일 수 있고, 반대로 어떤 곳은 열악한 땅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을 분배 받을 때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땅을 분배 받았다면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유욕과 보호본능이 강한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22,23절을 보면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러 사는 타국인에게도 기업이 되게 하라는 말씀인데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불만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기업을 주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되면 타국인 때문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몫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데 타국인에게도 기업을 주라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땅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십니다. 제비뽑기는 어떤 일의 순서를 정하거나 일을 분담할 때 자주 사용되는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고 선택된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해서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운이 좋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비뽑기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비뽑기라는 방식으로 땅을 분배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비뽑기는 인간의 선택이 관여될 수 없음을 뜻하고, 인간의 선택이 관여될 수 없다는 것은 땅을 분배 받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분배 받았다면 자신의 땅과 타인의 땅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분배된 땅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성전의 물로 인해 살아나고 새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 분배는 이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시행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수 18:10)고 말하는 것처럼 여호수아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대한 분배가 본문에서 말하는 제비뽑기로 시행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배하시는 땅의 경계선을 보면 민 34:1-12절의 땅 경계와 매우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배하셨던 땅을 다시 분배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분배하셨던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이 무너지고 황폐하여 졌기에 다시 새로운 지역의 땅을 분배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살고 있었던 땅을 다시 분배하시는 것입니다.

 

 

14절에서도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을 분배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합니다. 이미 분배하여 주신 땅이고 자자손손 대대로 살아오던 땅인데 왜 또 다시 분배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기존의 땅 분배를 모두 무효화하고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가면 본문의 말씀을 따라 새롭게 땅을 분배하여 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에스겔의 땅 분배는 성전의 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물로 인해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분배했을 때 분배된 땅에 대한 반응이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을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수 17:14절에 보면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라고 말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기업이 요셉에게는 두 몫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각기 기업이 분배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은 불만이었습니다. 분배된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 땅을 분배하여 기업을 주시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그들의 힘으로 싸워 이겨서 얻은 그들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누리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절기를 정하여 처음 열매를 바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이스라엘의 형편에서 그들이 거주하던 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거주하던 땅이니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땅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쫓아 보내신 것은 땅의 주인으로서 그 땅을 자기들 것처럼 여기는 강도와 같은 존재들에게 퇴거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땅을 분배하시는데 그 대상이 성전의 물로 인해 다시 살아난 자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땅 분배를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취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물로 다시 살아난 자,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있게 된 신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존의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이고자 하심입니다.

 

 

기존의 세상은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분노의 마음도 있습니다. 사회가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일하고 노력한 만큼 공평하게 분배되는 구조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분배 또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킴으로 불만이 없게 하는 공평의 구조로 시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꿈꾸는 공평으로 세워진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가 아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설사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가 건설되고 평생을 행복을 누린다 해도 언제나 결론은 죽음 이후의 세계로 이어집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멸망인가 생명인가로 비로소 인생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우리에게 제공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명의 세계를 만드시고 우리를 그 곳에 속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이고 성령을 보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아는 사람이고 따라서 신자는 세상과 다르게 ‘나는 예수님에 의해서 살았고 살아있고 살아간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디에서 살든 예수 안에 있습니다. 육신으로 머물고 있는 지역이나 환경, 형편에 붙들려 산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의 일일 뿐입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말하는 땅 분배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땅을 분배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된 것이라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분배하신 것이 됩니다. 우리의 공로와 선택에 따라 분배 받은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분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우월과 열등이 없이 오직 공평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성전에서 물이 나와 분배한 모든 땅을 적시고 그로 인해 과실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끊이지 않고 새 열매가 맺습니다. 죽은 것을 살리는 생명의 물이 땅에 흘러내린다는 것으로 땅은 최고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땅에 거하는 자가 바로 신자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가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다 해도 죄만 있는 곳이고 저주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사는 신자는 최고의 환경의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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