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3.25 15:21

(121강) 경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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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8:1-7http://onlycross.net/videos/eze/eze-48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2.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의 몫이요

3.아셀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의 몫이요

4.납달리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의 몫이요

5.므낫세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의 몫이요

6.에브라임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의 몫이요

7.르우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

 

<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아마 하나님의 뜻을 미래에 되어질 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하는 것도 힘든 일로 인해서 미래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새로운 일을 계획 할 때나 어려운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실패하지 않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까요? 단언컨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일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시는 은혜의 차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토정비결,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말하는 일 년 운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 희년이라는 절기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희년은 50년 마다 돌아오는 절기인데 희년이 되면 종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땅을 산 것이 있으면 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하나님은 희년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스라엘은 순종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희년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까? 희년이 지금도 실제로 실천되어야 할 규례로 존재한다면 순종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인간된 우리가 희년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 해도 그 뜻에 순종하지 않을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서 증거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순종하여 실천하고 이루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로 반드시 이루실 일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방식의 나라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 안에 사는 신자는 염려하고 불안해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평소에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살아갑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러한 사실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세상을 향한 자신의 욕구 안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어야 하고 내가 계획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셔서 책임지고 계시는 인생임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죄를 용서 받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다고는 말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총의 선물을 받은 자로서의 고백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라면 은혜와 사랑이 자신을 책임지고 있음을 신뢰하며 여호와만을 바라는 믿음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무엇보다 존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겔 48장에서 말합니다.

 

 

1절에 보면 “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땅에 경계선을 정하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각각의 몫으로 분배합니다. 본문에서는 성전이 있는 중앙 부분의 북쪽을 일곱 지파의 몫으로 분배를 하고 23-27절에서는 남쪽에 나머지 다섯 지파의 몫을 분배합니다.

 

 

그리고 각 지파에게 분배한 북쪽과 남쪽의 땅 중앙은 제사장들이 거하는 땅이고 그 땅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습니다(8-20절). 또한 제사장이 거하는 땅 동쪽과 서쪽에는 왕에게 속한 땅이 있습니다(21-22절).

본문에 보면 경계선이라는 말을 합니다. 지파와 지파의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고 이 경계선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옮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정된 땅을 받고 그 땅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을 때 그 뜻에 순종하고 살아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가 받은 땅의 경계선에 불만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경계선이 옮겨져 더 많은 땅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 19:14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신 27:17절에서는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이웃의 경계표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경계표를 정하실 때 각 지파의 신앙 정도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따져서 그에 따라 차별적으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세우신 약속에 따라 차지하게 하신 땅이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경계표를 정하신 것입니다.

 

 

분배 받은 땅은 누구에게도 팔지 못하게 하셨고 혹시 가난하여 팔게 되었다 해도 희년이 되면 다시 돌려주라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입니다. 결국 이웃의 기업을 값을 치르고 샀다 해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규례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신앙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니까 더 많은 것을 받아야 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웃의 경계표와 무관한 생각일까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웃의 경계표를 부당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미 심적으로 경계표를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경계표는 인간이 행한 공로에 따라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행한 공로를 따진다면 이스라엘은 어느 지파도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즉 경계선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계선이 생겼고 땅이 생겼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웃의 경계선을 옮기지 말라는 것도 단순히 이웃의 땅을 욕심 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경계표를 옮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계선도 다르지 않습니다. 8절에서 “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유다의 경계선 다음에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땅이 있고 그 땅의 중앙에는 성소가 존재합니다.

 

 

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자비와 긍휼이 있습니다. 땅을 예물로 드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해 땅을 분배 받았기에 분배 받은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언급되는 각 지파 사이에 있는 경계선은 ‘너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이스라엘이 해방이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고 땅을 분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게 된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 안에 인간의 공로와 의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각 지파의 경계선은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해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스라엘이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을 잘하든 아니면 예전 그대로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잘못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이 됩니다. ‘나는 신앙 생황을 잘하니까 잘못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서 떠난 것이 되고 그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어떤 실천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부터 수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주일을 잘 지켜’‘나는 기도를 많이 해’‘나는 몇 명을 전도 했어’‘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줬어’이러한 것이 자신을 신앙이 좋은 사람,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한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내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데도 신자라 할 수 있을까? 구원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한편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했을 때 스스로를 신앙으로 산다고 판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신자가 신앙으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앙으로 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밥 먹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많은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며 살아갈 자격,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고 감사하는 것이 뜻을 세우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분배 받은 땅으로 충분합니다. 땅의 위치나 면적, 다른 지파보다 좋은 땅인가는 전혀 관심을 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은 그 땅 조차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땅을 받은 것으로 자신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기쁨과 감사로 회복되는 것이 그들을 하나님 백성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안의 세계’가 됩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 존재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의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취향에 맞게 뜯어 고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아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자비와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결국 예수 안을 인간의 실천으로 덧칠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예수 안의 세계를 오염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땅은 이미 확정되어 분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다스려지는 땅입니다. 이 땅을 예수 안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을 그 땅에 살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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