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4.01 15:43

(122강) 중앙의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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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8:8-12http://onlycross.net/videos/eze/eze-4808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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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

9.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10.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서쪽으로 너비는 만 척이요 동쪽으로 너비가 만 척이요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11.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12.땅의 예물 중에서 그들이 예물을 받을지니 레위인의 접경지에 관한 가장 거룩한 예물이니라

 

 

<설교>

하나님은 언약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는 언약은 인간이 고안한 구원 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안한 구원 방식은 인간의 종교 본능에 의한 산물이며 인간의 믿음과 공로를 조건으로 하여 신으로부터 원하는 복과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언약이 이러한 인간의 구원 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의 공로, 즉 행함은 개입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뜻을 알고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흔히들 이해하는 것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을 신자라 하지 않습니다. 언약을 알지 못하고 언약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에 신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의 교회 됨’또한 언약을 기준으로 증거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언약 안에 있는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 언약이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 본능에 의한 종교 단체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곡해되어 있고 무엇보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교회에 속한 자로 인식할 뿐 자신이 교회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둔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열심을 내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신자 자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 가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언약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이며 언약이 빠진 신앙생활 역시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취미일 뿐임을 주지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 신앙이고 신앙이 아닌가는 언약이 기준 되어 판단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인간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자율과 의지에 의한 구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인간의 자율과 의지에 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구원 방식에 담긴 중대한 오류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묵살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빠졌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자율과 자기 의지에 의한 열심은 넘쳤지만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인간의 종교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성전도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 대부분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무엇인가를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지어지고 완성된 새로운 성전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땅 중앙에 있는 여호와의 성소로 말씀합니다.

 

 

8절에 보시면 “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다 경계선 다음에 베냐민 몫의 땅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릴 땅이 등장하고 그 땅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을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도 “그런즉 군주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의 사이에는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거룩한 땅을 포함하여 군주에게 속한 땅도 있고 성읍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북쪽의 땅을 분배 받은 일곱 지파와 남쪽의 땅을 분배 받은 다섯 지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지파가 땅을 분배 받았다면 남은 것은 그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일상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지파와 지파 사이에 존재하는 예물로 드려야 할 거룩한 땅에 대해서나 땅 중앙에 존재하는 여호와의 성소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호와의 성소가 거룩한 땅 중에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부터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이익이 되는 일이 있으면 관심을 둘 것이고 이익이 없다면 자연히 관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자기 이익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창 2: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드셨는가?’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악과의 존재가 인간에게는 해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 인간에게 해로운 것을 만들어 에덴동산 가운데에 두셨는지를 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나오는 질문은 많습니다. 인간을 유혹한 뱀을 왜 만드셨는지, 뱀이 인간을 유혹할 때나 하와가 뱀의 유혹으로 인해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은 왜 그 모든 것을 두고만 보셨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롭게 하시는 분인데 결과적으로 해가 된 일들에 대해 납득을 하지 못하겠다는 불만이 담긴 질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뱀이든 선악과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이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뱀과 선악과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로지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면 일곱 지파와 다섯 지파 사이에 거룩하게 구별된 땅이 있게 하시고 그 땅에 레위 지파의 땅과 제사장의 땅이 있게 하시고 제사장의 당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앙에 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모두에게 중앙에 위치한 여호와의 성소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여호와의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이 바다로 흘러가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고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고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소에서 흐르는 물로 인해 생명을 얻을 자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한 땅은 평범한 부동산이 아니라 성소에서 나오는 물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분배하신 땅은 죽음이 없고 생명만 있는 땅이고 그 땅을 분배 받은 것만으로 그들은 복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분배 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포로 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분배한 땅에 있게 하시고 그들 가운데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셔서 성소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떻게 해서 산자가 되었는지를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면 자신들의 중앙에 위치한 성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성소가 무엇이든, 성소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신이 관심 두는 일들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성소로 인해 살아가는데도 정작 성소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연히 성소에 대해 할 말도 사라지게 됩니다.

 

 

만약 여호와의 성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죽은 자들의 세계로 시작해서 죽은 자들의 세계로 끝날 뿐입니다. 생명은 없고 하나님이 마감하시면 모든 것을 끝내고 영원한 죽음의 세계에 갇히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세상의 운명임을 생각해 보면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를 있게 하신 것에서 죽은 자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말하는 인생에 대한 판단은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고 이룬 것이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여호와의 성전을 알지 못한다면 죽은 자라는 것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판단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판단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여유 있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후 3:4-5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 삽니다. 타인의 만족과 상관없이 자기에게 만족이 되지 않으면 불평 합니다. 이러한 자기만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규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만족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언약 방식의 구원입니다. 성소가 거룩한 땅의 중앙에 있고 그 성소로 인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게 된 것이 우리가 행한 것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언약 안에서는 우리를 자랑하고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사실 하나님의 언약 방식의 구원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악한 영에게 지배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만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조차도 하나님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방식에 위한 구원에 만족해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죄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주의 심판만 있습니다.

 

 

그런데 저주의 심판만 있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용서의 자리를 만드신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만족이 되어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새 마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말하면서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을 보면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교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서 한 일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자신이 믿음 좋은 신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교회 되는 것은 죄인 된 나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셔서 새로운 자로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한 분으로 여기며 예수님의 존귀함을 증거 하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대하 6:36-39절에 보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막론하고 끌고 간 후에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자기들을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과 주께서 택하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적국에 넘기신 것은 자신들을 사로잡은 땅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자신의 죄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됨으로 성소를 향하여 기도하며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 용서가 하나님이 건축한 성전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앙에 위치한 여호와의 성소에 관심 둘 자는 사로잡혀 살아가는 적군의 땅에서 자기 죄를 보는 자입니다. 자기 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있게 하신 성소 없이 자신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소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면 누가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고 살아갈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천국의 문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보지 못한 자는 천국의 문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관심이 없기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보지 못한 자의 관심은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으로만 향합니다.

 

 

교회 또한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기 죄와 하나님의 용서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자는 자기에게서 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서 용서를 봅니다. 자연히 온 마음은 그리스도로 향하며 그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교회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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