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4.15 16:37

(124강) 레위 사람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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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8:13-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4813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만 척이라

14.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설교>

인간은 자기 인생을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합니다. 종교를 통하여 마음의 위안과 안정을 얻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심리적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종교는 죽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즉 종교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종교의 힘으로도 죽음을 막거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물론 세상은 죽음을 자연의 이치나 우연한 사건 사고의 결과로 대할 뿐 죄의 결과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종교도 죄를 인간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내면의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하면 되는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복을 받거나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가게 되는 것은 ‘나 하기 나름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생각과 이해 자체가 죄의 속성임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죄는 인간이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음을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오시고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세계로 마음이 모아지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사와 함께 찬송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과 하나님의 세계를 분별하는 안목이 있게 하면서 종교가 아닌 생명이 되는 진리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자기 인생에 유익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활용되지만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누리는 참된 유익에 눈이 열리게 되면서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보이는 것으로 인생을 채우고자 하는 자신의 속성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더욱더 그리스도에게로만 끌리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신자 됨을 향한 소원이 있습니까? 이러한 소원이 있다면 성경은 재미없고 지루한 이야기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은 신비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온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소원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존재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고서는 성경이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죽음의 존재라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에게서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죽은 존재인 인간은 죽음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수긍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무너져야 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죽은 존재가 아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복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오늘 본문은 물론이고 에스겔 이야기, 그리고 나아가서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전부가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에스겔 48장의 이야기에서 제사장 땅의 중앙에 있는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에스겔의 내용은 단지 과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이야기일 뿐입니다. 즉 오늘의 우리와는 무관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는 땅을 분배 받고 본래는 기업이 없는 제사장, 레위 사람에게도 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의 땅 중앙에는 성소가 있고 성소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 죽음이 덮여지고 생명이 꽃피는 현장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땅 분배로부터 시작해서 성소에서 나오는 물의 혜택을 누리는 모든 것들이 값없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성소를 보면서 하나님의 값없이 베풀어진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소가 보여주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성소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로 인해 죽은 존재가 살았음을 보여주며 여전히 물로 인해 생명에 속한 존재로 살아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여호와의 성소를 통해서 죽은 자의 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를 보게 디는 것이고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만 척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땅과 동일한 면적의 땅을 레위 사람의 몫으로 주십니다. 레위 사람은 본래 그들의 몫으로 주어질 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사람에게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수 13:14절에서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도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분배 하십니다. 레위 지파에게 다른 지파와 같은 기업을 주지 않은 대신 하나님 여호와께 드려지는 화제물을 기업으로 주셨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가 기업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더 복을 누리는 것입니까? 당연히 레위지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땅보다는 하나님이 기업이 되 주시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앞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와 레위 지파 중 누가 불안하지 않은 안정적인 삶을 살 것으로 보입니까? 실제 삶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어느 쪽이냐는 것입니다. 생각은 하나님이 기업이 되 주시는 것을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는 것보다는 땅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가 더 안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기업이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성실하게 제사를 드려야 레위인들의 생활이 안정적으로 유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제사를 소홀히 한다면 자연히 레위 사람은 생존의 문제가 흔들리고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사람의 생계 문제를 들여다 보면 이스라엘의 신앙의 여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레위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고 어렵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성실하게 시행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제사에 성실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적고, 제물이 적다면 화제물을 기업으로 받은 레위사람들이 먹을 음식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록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는 것이 다른 것에 비할 수 없는 복이라고 해도 실제 생존의 문제에서는 아주 많이 불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생존의 문제에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는 복을 복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들은 땅에서 일을 하고 그 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이 되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책임지시기에 풍족하든 빈곤하든 하나님께 맡기고 주신 것만큼 먹고 마시며 살아가면 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기에 보이는 것이 부족함이 되지 않는 상태의 나라가 생명이 그 본질과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가 생명을 얻음으로 누리게 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는 레위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은 다른 지파와는 비할 수도 없는 놀라운 신비의 영광을 약속으로 받은 것이 됩니다.

 

 

레위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성소가 있는 제사장 땅의 경계선을 따라 몫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몫으로 주어진 땅의 가치를 알고 감사하다면 그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신앙 세계라는 것은 우리의 손으로 선한 일을 실천하며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이 되심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없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누리게 된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며 그것이 감사와 기쁨이 되는 상태가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겔 44:28-29절을 보면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지니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하여 드리는 물건을 다 그들에게 돌리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기업이고 산업이 되는 자들은 제사의 제물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단지 배부름을 위한 음식으로만 바라본다면 중요한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신분의 영광입니다.

 

 

제물을 먹는 것은 배부름의 수단이 아니라 제물과 하나 됨으로써 제물의 운명에 포함되는 것을 뜻합니다. 제물의 운명에 나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서 제물로 인해 사는 운명에 붙들린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제물이 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신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에게 약속되고, 죽은 자가 누리게 된 최상의 복입니다.

 

 

창 49:7절의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는 내용을 보면 레위는 야곱에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레위에게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고 제물을 먹을 수 있고 거룩히 구별된 땅이 몫으로 주어졌다면 레위로서는 엄청난 축복에 합류된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가 축복의 가치를 안다면 땅에서 무엇을 누리고 산들 자신의 신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합류되어 영원히 함께 할 신분이 부여된 신자의 가치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저주 받은 레위 사람이 거룩히 구별된 땅을 몫으로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제사장 땅에 있는 여호와의 성소 때문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레위 사람의 공로나 수고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혜택이 우리 같은 저주 받은 존재에게 주어진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는 악행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악행을 악행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신앙 행위로 간주하는 웃지 못 할 행태가 자행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을 팔지도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는 것은 땅의 소유권이 레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레위 사람은 삶의 토대가 하나님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른 지파는 레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레위 사람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48장에서 이스라엘이 땅을 분배 받은 이야기를 접했지만 땅을 분배 받은 이스라엘이 땅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땅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 흐르는 물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증거 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소에서 흐르는 물로 인해 저주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누리고 경험하게 되는 은혜의 땅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음에서 다시 산 놀라운 복과 기적을 확인하면서 장차 완성된 영광의 세계에 들어갈 날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수중에 무엇이 있다 해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옮겨진 은혜의 기적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으로 열려지고 굳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을 가볍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우리에게 무엇이 신앙생활인가를 보여줍니다. 기존의 우리의 생각을 무너뜨리고 여호와의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면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신자로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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