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4.22 15:58

(125강) 속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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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8:15-20http://onlycross.net/videos/eze/eze-48152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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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이 이만 오천척 다음으로 광 오천척은 속된 땅으로 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하는 곳과 들을 삼되 성이 그 중앙에 있게 할찌니

16.그 척수는 북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남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동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며

17.그 성의 들은 북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남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동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서으로 이백 오십척이며

18.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장이 동으로 일만척이요 서으로 일만척이라 곧 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그 땅의 소산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찌라

19.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그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는 그 땅을 기경할찌니라

20.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도합은 장도 이만 오천척이요 광도 이만 오천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 반듯할 것이니라

 

 

<설교>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겪었던 상황들은 배후에 존재하신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어진 사건들이고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역할을 선지자들이 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은 해방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 절망과 고통의 현실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분명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소식일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해방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다만 조금만 기다리면 해방된다는 막연하게 희망을 안겨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포로생활 70년 후에 하나님에 의해 돌아오게 될 것을 말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70년간 바벨론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절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포로 상태의 백성들에게 외친 말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4-6)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상태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해석한 선지자의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나 또 다른 누구에게 포로 되지 않은 상황의 우리에게 이사야의 이러한 말은 우리의 현실상황과는 무관한 것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포로가 된 상황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불안과 염려에 빠뜨리는 수많은 상황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겁내는 자, 두려워하는 자에 우리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 뭔가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특히 사람이라면 자본에 붙들리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 생각도 실상은 돈에 붙들린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돈에 붙들려 살아가는 우리가 맹인이고 저는 사람이고,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사야가 외친 말은 바로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각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한다면 수천 년 전에 외쳤던 선지자의 말이라 해도 오늘 나의 상황과 무관하지가 않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에스겔서의 이야기도 우리와 무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겪었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일하셨던 내용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오늘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알아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20)는 말을 했습니다.

 

 

사막에 강을 내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마시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런 말이 여러분의 현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까? 이사야의 말은 기존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을 우리는 에스겔에서 보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 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강이 이르는 각처의 모든 것이 살게 된다는 에스겔의 환상에서 이사야가 말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선지자가 말한 새로운 세상이 실현된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실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감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하나님에 의해 실현된 세상이 도래했고 그 세상이 지금은 없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지만 종말의 때가 실현되면 놀랍고 완전한 영광된 나라로 드러날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라는 말씀에서 속된 땅이 등장하는데 이 속된 땅에는 사방 사천 오백 척 규모의 성읍이 중앙에 세워져 있습니다.

 

 

속되다는 것은 부정하고 더럽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거룩한 것과 구별하여 철저하게 분리되어 취급됩니다. 거룩한 것에 속된 것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속된 것을 만진 손으로 거룩한 것을 만지면 속된 것이 부정해진다는 규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속된 것은 거룩한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20절의 “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합계는 길이도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도 이만 오천 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 반듯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속된 땅이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는 땅에 포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속된 땅이 거룩한 땅에 속하여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며 에스겔을 통해서 보이시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새로운 세상의 거룩한 길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된 땅이라면 원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저주의 땅입니다. 또한 속된 땅은 어느 한 구역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부가 속된 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속된 땅의 길이를 이만오천 척, 너비를 오천 척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일정 구역이 속된 것처럼 생각하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땅은 흙이 있는 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토지 가운데 속된 땅, 즉 부정한 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땅과 속된 땅의 길이나 너비를 말씀하신 것은 거룩하고 속된 것의 규정은 하나님에 의해 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하신 것만 거룩하고 속되다고 하신 것은 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하다’‘속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흔히 속되다는 말을 세속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돈과 같은 자기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속물근성’이라고 하면서 속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룩은 그 상태를 선뜻 이해하기가 난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을 사람의 언행이나 행동이 성스럽고 위대한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언행과 행동을 어떻게 하는 것이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거룩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거룩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속됨을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속됨은 거룩에 의해서 규정되고 드러나며 거룩에 의해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거룩과 속됨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신자를 거룩한 사람으로 일컫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 또한 거룩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속된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신자가 거룩하고 불신자가 속되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신자 된 여러분은 속된 사람이 불신자들을 행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거룩한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거룩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로서의 구별된 삶의 모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자로서 속된 것과 구별하여 거룩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속되다고 하는 불신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속성과 다르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시각에서 현대 기독교인을 보면 스스로 거룩한 신자라 하지만 속된 것과 구별 없이 속된 세계를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룩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속된 것에 가치관이 묻혀 진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거룩과 속된 것의 의미와 구분에 대한 의식이 둔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회 생활에만 충실하면 믿음이 있고 좋은 믿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거룩과 속됨에 관심 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고백하는 신자로써 교회로 모이는 것은 교회생활을 위함이 아니라 속된 세상에서 속되지 않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의 길을 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신자 된 여러분을 신자 되게 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거룩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소입니다. 속된 땅이 속됨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지 않고 거룩한 땅에 속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이 되는 것도 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된 땅에 세우진 성읍에 거주하는 사람은 성소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그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그 땅을 경작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성읍에 있는 사람들이 속된 땅을 경작하여 살아가면서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요? 그것은 속된 땅에 있는 자신들이 경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혜택이 베풀어진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는 것이 속된 자가 속된 삶의 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사 35:8절에 보면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거룩한 길로 말미암아 시온으로 돌아가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행할 수 있고 사자가 없어서 아주 안전한 길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사 35:9).

 

 

이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에 포로 된 백성들을 위해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길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로 생활하는 이스라엘에게 참된 구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거룩한 길을 지나 시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된 땅의 성읍의 사람들이 거룩한 땅에 속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되는 그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그 답은 우리의 길이 되시고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속된 땅은 성소에서 흐르는 생명의 물의 혜택을 받습니다. 생명의 물이 속된 땅의 성읍의 사람들을 거룩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땅에서 경작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신들을 속량하여 거룩한 성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성소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가 속된 존재를 거룩의 세계에 있게 한 생명의 물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속량을 받고 거룩한 길로 행하는 신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세워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이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보람이고 종교생활의 성공이며 인생의 전부인줄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영원한 영광의 세상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 되시고 하나님께 속량함을 받은 우리가 그 길로 행하여 영원한 영광의 시온에 이르게 됨을 믿으며 기쁨과 찬송으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세상은 우리가 현실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이미 완성된 세계로 존재함을 믿게 됩니다. 때문에 믿음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거룩한 길이 열려 있고 그 길로 인도 받으며 걷고 있는 것이 참되고 복된 현실입니다. 속된 존재인 우리에게 이러한 복이 허락되었음을 생각한다면 기쁨과 즐거움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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