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7.04.29 16:18

(126강) 여호와 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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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8:30-35http://onlycross.net/videos/eze/eze-48303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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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0.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설교>

이스라엘 역사에서 포로 시대는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생활하게 된 것은 야곱이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장 때부터입니다(출 1:8, 행 7: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장은 요셉의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음을 뜻합니다. 애굽은 요셉 당시에 칠년 기근을 요셉의 지혜로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의 땅을 소유하게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요셉으로 인한 것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셉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런 점에서 애굽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애굽이 존재되고 유지되는 것이 요셉의 배후에서 요셉을 다스리셨던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인하고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을 치시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애굽으로부터의 자유를 주고자 하신 취지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보전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으로 보시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즉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를 남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고 무시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심판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의 속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약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책임지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도전이었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마저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되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속에 있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에스겔을 세워서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보이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파괴하신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 행위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여겼던 이스라엘의 생각이 큰 착각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려가셔서 성전에서 행해졌던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게 하심으로 스스로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던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어떤 과정으로 누구의 행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의 대략적인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 파괴, 바벨론 포로가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성전은 이스라엘의 실패 위에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은 인간의 힘은 하나님의 일에 개입될 가치가 없으면 하나님 또한 인간의 힘이나 자질을 도구로 하여 일을 이루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루신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이 할 일은 모든 영광과 감사와 경배를 하나님께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신 이유고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 홀로 언약을 완성하신 것으로 남기고자 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결론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으로 인해서 속된 땅에 새로운 성읍이 세워지고 그 성읍은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의 물로 유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 :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부르는 것으로 에스겔서가 끝납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일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패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실패하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새벽 예배, 주일성수, 십일조, 활발한 선교 활동 등을 내세워 한국 기독교가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만 주장합니다. 이 모두가 성경을 통해 증거 되는 하나님의 참된 뜻이 인간의 종교성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합니다. 그것을 멸망과 포로라는 증거로 에스겔서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보는 시각이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비참과 부끄러운 상태에 무지합니다. 이러한 시각으로는 ‘여호와 삼마’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인 세계만 전부로 알고 있기에 결국 하나님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세계와는 무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건설하신 여호와 삼마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백성은 자신은 실패의 존재임을 알고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의 물이 나를 살게 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실패와 저주를 보게 되는 그들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 삼마라 이름 하는 성읍은 사방 사천 오백 척씩으로 되어 있고, 각각 문이 세 개씩 있습니다. 그리고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르는데 북쪽은 르우벤, 유다, 레위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쪽은 요셉, 베냐민, 단문으로 되어 있고, 남쪽은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문이고, 서쪽은 갓, 아셀, 납달리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읍에는 이스라엘의 지파들만이 들어가는 것일까요? 이 내용을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그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최종적인 존재들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읍 사방 열 두 문에 위치한 이스라엘 지파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그 지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역사적으로 존재한 지파들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로 귀화하여 어느 한 지파에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 이름을 이스라엘 지파로 한 것은 그들만이 성읍에 들어갈 수 있는 그들만의 성읍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성읍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 되는 일에 실패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성전과, 제사와, 제물과, 절기와 수많은 규례들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규례들을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기 확인의 수단으로만 알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고, 성전에서 제물을 바쳐 제사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으로 자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 되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고 결국 그들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읍 사방의 문에 지파들의 이름이 있는 것은 그 문자체가 실패자의 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실패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실패한 자가 실패한 상태 그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불의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성전에서의 제사 등등 나름대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여전히 불의한 자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실패인 것입니다.

 

 

열 두 지파의 시작 자체가 서로 남편에게 사랑 받기 위해 경쟁하고 이기고자 하는 탐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이 서로 야곱에게 사랑 받기 위해 아들을 낳고자 투쟁한 결과가 열 두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열 두 지파 자체가 탐욕에서 생산된 죄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삼마가 의미하는 것은 실패자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를 도우시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안될 일을 되게 하며,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삼마’와 함께 ‘임마누엘’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삼마와 임마누엘의 의미는 다릅니다. 여호와가 계신다는 뜻으로만 보면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임마누엘은 심판의 의미에서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심판 받을 자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심판 아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며 그 속에서 사랑 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미움 받을 자는 내어버려두시고 사랑 받을 자는 간섭하시면서 죄를 알게 하시고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겠다는 것이 여호와 삼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라는 최종적인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고 그 나라의 백성들을 채우시기 위해 실패를 알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실패를 알게 하시고 생명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보게 하시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들만이 여호와 삼마의 세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 성읍의 백성들은 모든 관심과 시선을 생명이 되는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어지럽게 살아가는 세상 밖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어진 새로운 세계에 눈을 두게 됩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여전히 본성에 의해 사라질 세상에 미련을 두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 현실의 자신을 자각하고 세상이 희망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시자가로 세워진 새로운 세계가 희망이라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성된 영원한 영광을 온전히 알게 되고 실제적으로 누리는 그 날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경험했던 것은 죽음에 속하지 않은 자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세상을 잊어버리고 그곳에서 초막 셋을 짓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이 바로 죽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만나는 곳이고, 오늘 본문처럼 죽음에 속하지 않은 여호와가 계신 세계를 만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이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면 세상일은 지나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 않을까요?

 

 

계 21: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뜻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는 땅과 상관없이 하늘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짐을 뜻합니다. 결코 땅에서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여호와 삼마입니다.

 

 

성읍의 백성은 자신이 어떻게 성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내막을 잘 알기에 자신이 행한 일이나 이룬 것들을 보여주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읍에 들어오게 된 내막에 대해 얘기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된 신자가 자신을 신부로 삼으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증거 함으로써 자기의 한 일, 공로, 업적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이 예수를 모르는 것이고 구원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아님을 증거 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아무도 반응하는 이가 없고 오히려 반발한다 해도 그와 무관하게 신자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의 반응보다는 신자로서 가는 길과 그 방향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삼마라는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 21:3,4절을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성취된 복의 세계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이 복이 하나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한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 것은 다 지나간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처음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 괴로움 또한 지나가는 것임을 믿으며 처음 같이 다 지나간 완성의 세계를 소망하고 바라봄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를 즐거움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삼마라 이름 하는 새로운 성읍에 속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그것이 기적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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