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07.26 09:52

(1강) 허물과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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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1-16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101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3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5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6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7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0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11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2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13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15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설교>

선지서를 보면 온통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에 대한 얘기로 가득합니다. 선지자들은 그렇게 할 말이 없었을까요? 죄와 심판에 관한 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해 가르칠 다른 내용은 없었을까요?

 

 

우리는 죄와 심판에 관한 얘기가 신앙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 얘기보다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소망을 주는 내용들이 더 신앙에 유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행하는 것이 상담학이나 위로와 치유 사역입니다. 대신 죄와 심판에 관한 얘기는 자취를 감춥니다. 설령 죄와 심판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경을 빙자하여 교인들을 목사가 뜻한 대로 행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할 경우가 많습니다.

 

 

선지자가 죄에 대해 선포하는 것은 인간이 신앙의 근간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허물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붙들고 의존하고 있는 그 어떤 신앙의 근간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할 수 없음을 알게 함으로써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근거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신앙의 바른 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죄와 심판에 대해 소홀히 함으로써 죄에 대해 무지한 형편이 되었습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이 의라고 여기는 것을 의존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근거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어둡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에 대해 쉬지 않고 외치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자신의 행함에서 의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의를 근거로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정신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증언하시되 성전에서 그리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세상에는 참된 신앙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김수환 추기경은 분명 참된 신앙인입니다. 그의 삶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외적인 삶과 행함을 근거로 합니다. 만약 삶과 행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도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가할 수 있는 조건과 근거가 삶과 행함이 아니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과 행함에 의해 누구는 선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누구는 악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스라엘도 외적인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신앙인이고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전에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부를 증언하시겠다고 합니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같은 증언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만물을 향한 증언임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도 성전에서 증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증언하신다면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일까요?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근거가 되어 의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요? 성전에서 의로 증언되는 것은 제물의 거룩한 피로써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인간의 열심이나 실천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율법에 충실했다면 그들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알았어야 합니다. 즉 율법으로 인해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어야 했고, 성전에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의 뚜껑인 속죄소에 정결한 제물의 피를 뿌려야 하는 이유를 알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의미를 몰랐고 그로 인해 자기 실천을 신앙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오히려 성전에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훼손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에서 하나님이 증언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3,4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지고 부서져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아무리 자신들의 의를 주장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묵살한 채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눈이 열려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데 야곱의 허물은 사마리아고, 유다의 산당은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뒤에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제사를 위해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둡니다(왕상 12:28-30). 하나님은 성전에서만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은 무시한 채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하는 근거가 제물의 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용서에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열심을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있었지만 성전의 의미를 몰랐고, 따라서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였을 뿐입니다.

 

 

결국 제물의 피는 알지 못한 채 제사하는 자기 열심을 신앙의 근거로 삼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유다에게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산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산당은 예루살렘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전부의 허물이고 죄였습니다.

 

 

6,7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당할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8,9절)고 반응합니다.

 

 

우리에게 선지자의 이런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내 자신에 대해 애통하고 애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죄에 갇혀 있으면서도 죄를 모르고 하나님의 용서를 무시한 자로 살았던 자신의 죄와 허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기에 대해 애통하고 애곡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용서가 구원의 근거임을 믿는다면 용서의 세계에 인간의 의는 절대로 끼어들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로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용서에 감사하고 용서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용서에 보답하는 자로 살라고 합니다. 그것이 곧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신자에게서 증거될 것은 용서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에게서 증거될 것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우리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랑과 용서의 행위도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어떤 행함도 자신의 실천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의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입만 열면 죄와 허물에 대해 외친 이유를 알겠습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의의 백성으로 자부했지만 사실은 철저한 심판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죄와 심판을 쉬지 않고 외친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인간의 의를 의존하지 않고 성경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의존하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 죄와 심판을 외치는 의도입니다.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의 비밀, 하나님의 속죄의 놀라운 희생의 가치를 알고 깨닫게 된 것으로 감사하는 그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