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08.02 19:23

(2강) 힘을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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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1-13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201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4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5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8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9 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10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11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12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설교>

힘이 있어야 원하는 세상을 살 수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나의 힘입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물론 교회마다 하나님을 힘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속셈은 자신이 원하는 힘을 주실 수 있는 힘을 가진 하나님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힘 있는 하나님이시니 원하는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은 항상 구석으로 밀리고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것은 힘없는 자의 하소연으로만 들릴 뿐 세상은 관심두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물가가 오른다는 소식에 근심이 늘고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돈 없는 약자들이지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힘 있는 자에게는 물가가 오르든 공공요금이 오르든 관심 밖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 현실에 눈이 뜨인 사람들입니다. 힘없는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세상 현실에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십자가의 피보다는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결국 솔직히 우리는 진리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항상 실패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실체입니다. 아닌 척 하면서 타인에게 자신을 감추고 있을 뿐이지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는 모두 믿음의 실패자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실패하지만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는 실패자임을 절감하면서 그리스도만이 나를 살리는 힘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는 모임이 곧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약자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잃어버리지 않고 살려내는 자가 있다면, 영원히 죽음이 처하게 되는 자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주어진 확실하고 확고한 운명입니다. 신자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정된 그 운명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말씀 안에서 확정된 세상의 운명을 바라본다면, 지금 세상이 자랑스러워하고 영광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는 것들이 모두 헛된 것임을 보게 됩니다.

 

 

1,2절을 보면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손에 힘을 가지고 그 힘을 행하는 자는 화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힘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약자의 것을 탐하고 빼앗고 강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힘을 행하는 것이 화를 당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힘을 행한다는 것은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힘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세상을 산다면 그 손에 힘이 주어졌다고 해도 힘을 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힘을 행하는 자에게 화가 있는 것은, 힘으로 약자의 것을 강탈하는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 사람을 살리는 것은 힘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일까요? 세상만 바라본다면 마지막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세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마지막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따라서 마지막 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라는 답을 내리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모른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실패자의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신자에게 이런 생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면 가장 지혜로운 삶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긍휼과 자비의 용서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힘을 가지고 힘을 행하는 쾌감으로 삽니다. 힘이 있어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위치로 더욱 높이 오르기를 원합니다. 힘으로 구축된 세상이 가차 없이 와해될 때가 있다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나는 용서로 산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세상의 힘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가 없는가만 물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말씀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세계도 무너진 채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살리는 세계만 참된 세상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8-10절에도 보면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에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도덕적인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용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용서가 존재하게 합니다. 이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말씀의 세계에서 세상의 실체와 우리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심판에서 면제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그들에게서 이방인의 속성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땅은 이방인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취급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힘을 행하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속성입니다. 그런데도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힘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신자라고 착각합니다.

 

 

힘이 좋습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좋습니까? 입술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마음은 힘으로 향하는 우리의 불의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불의한 자가 우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저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용서가 신자에게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용서를 안다면 신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것들이 참으로 헛되고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힘을 가지고 힘을 행하는 자로 사는 것보다는 용서를 아는 자로 남기를 소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