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09.13 17:58

(8강) 여호와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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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6:1-5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601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설교>

우리는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믿습니다. 그리고 좋으신 분이기에 항상 좋은 일만 했게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헛된 것이고 나 혼자만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일률적인 경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기뻐할 일이 있으면 슬퍼할 일도 있으며, 때로는 억울하고 부당한 일도 겪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힘들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어떤 원칙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사람은 평생 고생을 한다든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잘 산다든지, 불신자는 힘들게 살지만 신자는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을 때 신자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항변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고통을 겪을 때 마치 그것이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항변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변론을 하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산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목격한 자연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을 향해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한 산을 향해서 너희의 억울함을 하소연 해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산이 너희들의 억울함을 옳다고 할 것 같으냐는 것입니다.

 

 

결국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부당하신 적이 없고 정당하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자로 존재해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당한 존재가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많이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부당한 존재라는 뜻이고, 이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힘든 삶도 나 같은 자에게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부당한 존재인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의에 속한 자로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일하십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삶까지도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는 시련과 고통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한 순간도 우리에게 정당하지 않는 분으로 존재하신 적이 없습니다.

 

 

3,4절을 보면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시련들이 과연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문제인가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이 뭐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서 그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홍해가 가로막았을 때,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애굽에서 먹던 것이 그리울 때 어김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들이 괴롭다는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증거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거하고 있는 땅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세상의 것에 치우쳐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고통을 겪는 것이 과연 부당한 일일까요?

 

 

이스라엘을 우리 자신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데, 여전히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고통을 겪는다면 과연 억울하고 부당한 것일까요?

 

 

5절을 보면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꾀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말이 나오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싯딤에서 길갈까지 있었던 사건에는 미디안의 패배와 요단을 건넌 일,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일이 있습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 백성의 여인과 음행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이만 사천 명을 죽게 하시고 미디안 또한 심판을 받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이처럼 이스라엘의 원망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 앞을 가로 막은 요단강을 홍해를 건너게 하신 기적으로 건너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리고 성을 칼 한번 쓰지 않고 무너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살아온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인한 것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을 벗어날 때는 그들을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시면서 백성다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괴로움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편한 인생을 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끝을 보면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은 공의로우신 일이라고 합니다. 의롭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처럼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되어진 모든 일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에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나를 유익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사랑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면 신자로서는 큰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이 여러분께 과연 당연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당연한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과분할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세상에 기울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고통에 밀어 넣으셔서 정신 차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