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09.20 22:41

(9강)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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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6:6-8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606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설교>

‘개 눈에는 똥 밖에 안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지식수준에 따라서 그 지식수준에 맞추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강한 욕망이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자기 욕망의 기준을 따라 판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식과 지식수준에서 그 사물의 본질을 먼저 규정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 사물의 본질이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습성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이미 욕망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에 가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기 욕망이 근거가 된 판단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믿음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 때 대처 방법입니다. 6-7절을 보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을 받았고, 남쪽 유다 역시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이 불의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고통은 그들의 죄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 대개 어떤 생각을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자신의 정성과 믿음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증명하고자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제물로 자기 믿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자연히 제물의 가치에 있게 됩니다. 제물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일수록 믿음과 정성이 크다는 것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최고의 정성을 담은 제물로 맏아들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사람에게 맏아들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맏아들을 제물 삼아 신을 경배 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제물을 가지고 신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최고의 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세상의 생각이고 신에 대한 시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허물과 자기의 죄를 위해 맏아들을 바치고 몸의 열매를 들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몸의 열매란 아마 육신의 고행이나, 고생을 자처한 신앙적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고행, 또는 고생을 자처한 신앙적 행동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정성으로 여긴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그같이 가르치고 있는 탓이기도 합니다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기뻐하시고 감동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함께 소경된 자로써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아가고,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보시고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을 인간이 바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그에 따라 상과 복도 다르게 주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를 향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서 그 영혼의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보기 때문에 그 같은 가짜 하나님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을 펼치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말만 의지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꿰맞춰진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의 말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면서 그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의 정성을 제물을 도구 삼아 드러내고자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인간의 욕망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종교의 시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절)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신자에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선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하나님이 선한 것으로 여기시는 것을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자가 바치는 제물 자체가 하나님이 구하시는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아마 이 같은 말을 거북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신앙의 증거물로 여겼던 것이 모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물이 하나님이 구하시는 선한 것이 아니라면 힘써서 헌금할 이유도 보람도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북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헌금을 하는 자기 행위에 매어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치는 제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제물의 희생으로 인한 죄사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고 사랑입니다.

 

 

따라서 죄와 허물을 용서받는 것이 인간의 정성이나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자비로 인한 것임을 아는 신자라면 자연히 자신의 행함이나 정성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게 됩니다.

 

 

신자는 죄와 허물로 가득한 자신을 용서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하나님의 낮아지신 사랑을 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신자에게서 정의로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맏아들을 제물로 바친다고 해도 그 의도가 순수하겠습니까? 귀한 맏아들을 바친다면 그보다 더 큰 것을 하나님께 받고 싶은 의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내게 가장 귀한 것을 내 놓았는데 하나님이 설마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정의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제물에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사람에 대해서도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차별을 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각의 사람에게서는 낮은 자리에 있는 인자에 대한 사랑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귀한 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교만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무엇을 바치는 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신자는 이미 모든 죄가 용서되고 사함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의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서 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