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10.11 11:21

(11강) 재앙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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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7:1-7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7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설교>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없다고 해도 세상은 나름대로 선을 추구하고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최고의 선함과 착함을 실천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인간이 보여주는 최고의 선과 착함도 의는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최고의 열심과 정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에 인간이 내 놓는 종교적인 열심과 정성도 의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해결책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가 의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착함을 의지해서는 안되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자가 되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이 믿음으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최선의 열심과 정성을 보이고 실천했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과 열심도 죄를 덮을 수 있는 의로운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죄를 용서 받고 덮을만한 의의 행동이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의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의로운 예수님이 오시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재앙이로다 나여’라는 말은 선지자 개인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여름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처럼 먹을 포도송이가 없고 처음 익은 무화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열매가 없는 것이 예루살렘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2,3절에서 말한 것처럼 경건한 자는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없습니다. 오직 서로 자신을 위해 살아갈 뿐이고 그 때문에 피를 흘리며 형제를 잡으려 하고 힘 있는 자는 뇌물을 받고, 욕심을 따라 서로 결탁하는 악행만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예루살렘의 실체였는데, 그런 예루살렘이 천천의 숫양을 바치고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바치고 이방인처럼 맏아들을 바친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6: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한 불의함이 가득했을 뿐이고, 그런 불의함을 제사를 향한 열심과 정성으로 덮으려는 종교성만 있었을 뿐입니다.

 

 

천천의 숫양을 바치고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바치는 제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재앙이로다’라고 경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열매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은 인간의 열심과 정성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열매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정성과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들의 착각과 동일한 착각에 빠져 있다면 ‘재앙이로다’라는 경고의 외침은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고 말합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정직한 자가 없고, 오직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 이익을 구하는 세상에서는 아무리 선하고 정직한 자라 할지라도 타인에게는 가시와 같고 찔레 울타리보다 더한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중심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세상에서 선하고 정직하게 행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을 해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가시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고, 또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찔레 울타리처럼 타인을 경계하고 밀쳐내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선을 말하고 정직을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는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정직하게 행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인간은 불의할 수밖에 없고, 불의한 자가 무엇을 바치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는가?’에 대한 물음은 인간은 불의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에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면, 인간의 의는 절대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의로운 것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도 의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지 신자 개인의 의지와 성품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는 불의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뿐이고, 믿음의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있으니 나는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이다’는 생각은 추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구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되어진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인간관계는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항상 자기중심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이웃도 친구도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심지어는 혈육의 관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육신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믿을만한 믿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다가도 언제든 육신의 문제로 인해서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은 재앙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자하심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음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경건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7절의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는 말씀에 해당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능합니다. 왜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어야 하는가를 알았을 때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바라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신자는 오직 의를 구할 뿐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세상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신자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