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10.18 14:35

(12강) 공의를 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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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7:8-13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708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10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13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설교>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수긍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 하나님의 공의와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는 세상이라면 악이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와 부정이 가득하고, 부자는 더 부자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는 사회의 악순환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의문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불평을 했고, 렘 12:1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도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고 반역한 자가 평안한 것이 무슨 까닭인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 신자가 고통을 받으며 살기도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 평안을 누리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믿지 않는 자가 신자를 조롱하기도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 사는데, 하나님을 믿는 너는 왜 그 꼴이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8절에 보면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이 볼 때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라는 그들의 신이 함께 하거나 지켜준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방인을 향해서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비록 지금은 넘어진 것처럼 보이고 어둠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다시 일어나게 하실 것이고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바라보는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고통을 받는다면 원망이 나오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원망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범죄한 존재로 여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이스라엘이 고통을 겪고 멸망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가 없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공의로 다스리고 계시는 증거가 이스라엘의 징계입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악에 대한 분노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시고 빛을 바라보고 빛의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넘어지게 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이스라엘이 굳게 서서 걸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참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넘어졌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실 것이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사랑의 행함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에는 사랑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이 어려운 형편을 다시 좋게 해주신다는 뜻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는 믿음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편안히 사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복된 자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징계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로 행해지는 징계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넘어진 가운데서도 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를 모르면 하박국이나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에 대해 불평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불평을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진짜 현실은 마지막 때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자가 평안을 누린다고 해서 그 평안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그들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행하실 그 일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눈에는 세상에서의 형통이 형통으로 보여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복으로 보여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한 채 세상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안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안목에 의해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오직 의에 속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현실을 전부로 여기지 마십시오. 세상의 형통과 복을 원하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이 빛이 되심을 믿는 믿음이 있기를 원하십시오. 이것이 신자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13절에서 말한 대로 세상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로 인해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의 눈에는 풍족하게 살고 편안함을 누리는 인생들이 부럽고 그것이 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세상 것을 전부로 여기고 자신의 힘을 믿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세상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풍족함을 누리고 살았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힘 있는 사람이 그 힘으로 죽음까지 이길 수 있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히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권세인 죽음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형통을 누리고 부요하게 살고 세상을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해도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죽음이라는 공평함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이 가야할 길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권력자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영원한 고통이 이어지는 죽음의 세계 안에서는 부자로 살았다, 가난한 자로 살았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잠깐 동안의 추억으로 끝날 뿐입니다.

 

 

우리도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죽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하나님의 법칙 앞에 인간은 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건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무엇이 복일까요? 무엇이 형통일까요? 신자의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면 결국 그는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고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도 신자에게는 형통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삶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내어 버려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간섭하시면서 넘어지게 하시고 흔드시고 어둠에 갇히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넘어지게 하십니다. 빛을 보게 하기 위해 어둠에 갇히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 중심의 사건에 빠지고, 자기 구원에 빠져서 하나님을 불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어야 하고, 세상이 분명 하나님의 공의로 다스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