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010.10.25 09:20

(13강) 자비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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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7:14-20http://onlycross.net/videos/micah/micah-0714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4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5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

16 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설교>

신자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것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믿음의 가치를 안다고 할 수 있고, 말씀 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제대로 파악한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복의 근원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복에 이미 참여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복을 찾고 세상의 것으로 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항상 세상의 가진 자 앞에서 주눅 들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야곱의 가족은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때 애굽의 왕 앞에 선 야곱이 왕을 축복합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다면 그것은 야곱이 복을 누린 자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당시 야곱은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나그네였고, 바로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왕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입장이 거꾸로 된 것입니다.

 

 

복에 대한 야곱의 시각이 얍복강에서 씨름을 하기 전이라면 바로 권세 앞에서 주눅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얍복강의 씨름을 통해서 복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야곱의 눈에 바로는 부러움의 대상도, 복을 누리는 자도 아닌 예전의 자신처럼 복을 알아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할 자로 보였을 뿐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신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당당함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아는 믿음이 참 복임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신자는 천국과 지옥, 심판과 구원,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힘 있는 자 앞에서 주눅 들어 삽니다.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고, 자신보다 높아진 자들을 시기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나약함입니다. 이 나약함은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 있는 신자는 현재의 환경 조건과 상관없이 말씀에 의해서 이미 복 있는 자로 증거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현재의 모습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는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무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능해서도 아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보게 하시고,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그들을 살게 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고통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어둠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빛이 되시고 그들을 일으키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이 같은 시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14,15절을 보면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지팡이는 목자의 지팡이를 의미하고, 목자의 지팡이는 자신의 양을 이리와 같은 맹수로부터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주의 기업의 양떼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뜻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남은 자,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홀로 감림 속 삼림에 거주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을 주의 지팡이로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 처한 환경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감림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것과 같이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의 지팡이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빛이 되시고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가진 자가 승자이고 잃는 자는 패자입니다. 그리고 승자는 패자 위에 서는 것이 법칙이지만 이같은 법칙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심판을 받아야 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승자든 패자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고 패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패하고 고통에 처하게 된 것은 이방인이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을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하나님의 일이 보일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외적인 승리에 도취되고 자신보다 나약한 자를 무시하고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16,17절에서 “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여호와께로 돌아와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되어질 일인데 그런데도 지금의 자기 인생이 초라하다 하여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 낙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세상에서 이루실 일은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는 믿음 없는 시각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러한 은혜를 베푸실까?’라는 의심이 있다면, 자신을 보지 마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람됨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이끌어 낸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심판이 마땅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20절에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돌아오고 회복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야곱에게는 성실을 베푸셨고 아브라함에게는 인애를 더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야곱도 아브라함도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잘남으로 사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성실을 베푸시고 인애를 더하신 결과로 우리가 주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비참함입니다. 우리 역시도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자비하시고 빛이 되신 하나님이 다가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를 안다는 증거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생명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세상이 생명으로 여기는 것들은 모두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 됨이 있습니까?

 

 

신자의 눈에는 돈 없는 것이 초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지 못한 것이 초라한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을 신자의 부요함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내게 복이 넘칩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분량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한 소원으로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