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2010.11.01 09:29

(1강) 니느웨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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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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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설교>

나훔은 니느웨를 향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데 선지자가 심판을 경고할 때는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유다가 앗수르에 의해서 큰 위기에 빠져있을 때입니다.

 

 

니느웨가 심판을 경고 받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괴롭혔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다가 괴롭힘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세워서 하신 일입니다. 때문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유다를 괴롭힌다는 것이 심판의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앗수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앗수르가 곧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진노를 품으시고 보복하시겠다는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앗수르의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 수 없는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힘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스라엘을 조롱을 합니다.

 

 

왕하 18:33절부터 보면 유다를 공격한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자신의 공격에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유다를 조롱합니다. 당시 랍사게는 유다를 힘없는 존재로 여기면서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조롱 합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은 무능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신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앗수르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들에게 보복하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장 심판이 내려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우리에게 물으시는 대신 아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들을 내세워서라도 죄에 대해서는 보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앗수르가 당장 죄에 대한 보복을 당하지 않은 것은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것은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만약 죄에 대해서 그 즉시 보복하신다면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는 없습니다. 벌써 심판과 함께 영원한 죽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조용합니다. 그 이유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믿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하는 백성을 모두 부르실 때는 하나님은 참고 계실 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심판도 농담처럼 여기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에 대해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이 선지자의 경고입니다.

 

 

6절을 보면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서 그 분노를 견디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세상을 깨드리고 사라지게 할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경고 아래 있는 세상은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면서 오래 참고 계실 뿐입니다.

 

 

세상은 오래 참으심조차도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아예 부인하는 증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무리 인자와 자비를 나타내고 보이신다고 해도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은 진노와 보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인해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평온한 세상이 아니라 진노와 보복으로 인한 심판이 경고되어 있고 예비된 세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조롱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고, 자신 또한 하나님의 간섭으로 살고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피할 곳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7,8절을 보면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화재나 홍수나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살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을 미리 교육합니다. 그러면 누가 심판 때에 건짐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여호와께 피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이유는 여호와를 거스르고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무능한 존재로 조롱을 하고 자기들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살아계신 분으로, 그리고 참된 권능자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심판 때 건짐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믿음이 곧 힘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여호와가 피난처라는 말을 합니다. 과연 그 말이 진심일까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그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을까요? 힘든 문제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절망으로 밀어 넣어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면 여호와가 피난처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심판은 절망적인 상황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게 되면 세상은 존재할 수 없고, 생명을 유지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현장에서 희망이 무엇입니까?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현실을 미리 예상하는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유일한 피난처로 알고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아신다고 합니다.

 

 

돈으로 사는 인생, 권력이 좋은 인생, 그 모든 것은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도 권력도 심판이라는 절망의 자리에서는 힘도 희망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현장에서 우리를 건지는 힘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를 사는 신자는 항상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영원한 어둠으로 쫓겨 갈 때 신자는 영원한 빛의 세계로 인도 받게 됩니다. 심판이 없다면 우리도 땅의 것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심판이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경고는 이 세상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이 일을 무시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