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2010.11.08 09:08

(2강) 아름다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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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9-15http://onlycross.net/videos/nahum/na-0109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설교>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를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은 분명 듣기 좋은 말이나 부드러운 어휘는 아닙니다. 심판을 선포한다는 것은 ‘너희들 가만두지 않겠다. 몽땅 다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듣기 좋거나 부드러운 말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긴장되고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심판을 선포하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말한 대로 선지자는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4절까지의 내용이 모두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판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소식’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선지자가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이나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미담과 같은 것을 아름다운 소식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분쟁과 싸움이 있는 곳에 뛰어 들어가 중재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싸움을 멈추게 하는 것을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로 이해하기도 하고, 아니면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화평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15절을 보면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유다를 향해서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앗수르는 유다를 공격하여 위기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하나님도 유다를 도울 수 없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이러한 앗수르를 그냥 두신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앗수르를 진멸하고 다시는 유다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단지 유다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앗수르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앗수르를 세워서 하나님을 망하게 하시고 유다를 공격하게 하여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갈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삶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도, 이방인을 위해서도 일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과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여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심판의 날에 구원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은 오직 여호와뿐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시각이 있는 신자는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의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현실만 보면 세상의 것이 분명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징계하시면서 세상이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는 때가 있음을 가르치시면서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악인이 진멸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소식이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앗수르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아니라 돈이 힘이라고 외칩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이 잘되는 것으로 돌려 드릴테니 영광 받고 싶으면 나를 성공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믿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 ‘나는 너를 아는 바가 없다’고 하실 뿐입니다.

 

 

11절을 보면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한 일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 36장을 보면 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합니다. 그때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유다를 향해 ‘너희들의 왕이 여호와를 믿으면 반드시 구원해줄 것이라는 말을 해도 믿지 말라’고 조롱합니다. 항복하고 앗수르 왕에게 나오면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우물물을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 편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악한 것을 권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랍사게의 말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의 위기에 빠져 있는 현실에서 믿음이 무슨 가치가 있고 힘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항복하고 앗수르 왕에게 나오는 것이 현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현실만 생각한다면 랍사게의 말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처럼 현실을 보게 하면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는 것이 사악한 것에 해당 됩니다.

 

 

우리의 현실만 본다면 믿음은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잊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 자신의 영광을 굳게 세우시는 날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무엇이 참된 힘이었는가가 드러날 것이고,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신자는 마음에 그 날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날이 과연 우리 마음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만을 보면 도무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인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 뒤죽박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판의 날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여호와께 피한 자만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삶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마음을 뺏김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세우시는 때가 있음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심판을 단지 믿지 않는 자를 지옥 보내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아는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날이고, 하나님께 피한 자기 백성을 알아주심으로써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의미로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도, 헛된 일도 아니라는 것이 심판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심판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나를 심판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이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는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