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2010.11.15 21:27

(3강) 영광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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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2:1-13http://onlycross.net/videos/nahum/na-0201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현대 교회가 표방하는 신앙은 번영 신앙, 또는 승리주의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번영과 승리를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증거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가 번영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신자가 병에 걸리고 어려움을 겪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불신자도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믿음을 번영과 승리로 연결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을 자초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과 승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쇠퇴와 패배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쇠퇴하고 패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은 것은 곧 믿음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유다에게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신다’는 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다윗 시대에 누렸던 영광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다시 다윗 시대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것을 보면 그런 의미의 회복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1절을 보면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고 말합니다.

 

 

파괴하는 자는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도구 삼아 앗수르를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말한 대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멸망하고 유다를 위기에 빠뜨리게 한 모든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믿고 하나님까지 조롱 했습니다. 그런 앗수르를 바벨론을 일으켜서 심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을 도구 삼아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것일까요? 이왕이면 위기에 빠진 유다로 하여금 앗수르를 심판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을 돕고 계신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결국 힘과 연관된 하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위기의 상황에서도 일어나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부를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으로 알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만을 백성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성경에서는 ‘남은 자’로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피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지 않음을 뜻합니다. 하나님만이 힘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도 힘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안다면 그 심판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이 생명이 됨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께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만 하나님이 아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증거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아시는 백성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로 하여금 앗수르를 공격하고 승리하게 한다면 그들은 힘의 승리를 맛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을 이용해서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이유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복하고자 하시는 야곱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서 번성하고 승리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자권을 가로챘고 이삭으로부터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야곱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야곱도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지팡이를 의지하며 사는 인생이 되면서부터 진정한 복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주어진 영광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게 된 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누리는 최고의 영광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6-8절을 보면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서 비참한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가 현실만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힘의 결과로 믿고 하나님까지 조롱했지만 결국 전지전능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약속 아래 있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힘도 이길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뜻이 함께 하신 신자를 누가 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부르신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지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을 세계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나 도우심은 세상에서의 번성이나 승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낮아지게 하시고 고통의 길을 가게도 하십니다.

 

 

믿음은 세상에서의 번성과 승리를 넘어섭니다. 예수님이 이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번성과 승리의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로 승리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인 것이지 힘으로 군림하는 승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길은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쇠퇴의 길이고 패배의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십자가의 길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우리는 세상의 번성과 힘과 승리를 복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만약 십자가를 말하면서 여전히 세상에서의 번성과 승리에 목말라 한다면 그에게 십자가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표시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애당초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영광으로 회복하시기 위해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