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2010.11.22 21:12

(4강) 멸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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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3:1-19http://onlycross.net/videos/nahum/na-0301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16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설교>

 

선지자는 니느웨가 장차 어떻게 멸망될 것인가에 대해 자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즉 앗수르는 장차 바벨론에 의해서 철저하게 멸망됩니다. 그렇다면 앗수르의 멸망은 약자와 강자의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흘러가지만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오직 힘을 믿습니다. 힘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큰소리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멸망이 과연 바벨론보다 힘이 약했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전부일까요?

 

 

1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췬 니느웨 성은 피로 가득했습니다. 거짓과 악이 가득하고 탈취가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니느웨 성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악과 거짓과 탈취는 필히 존재합니다. 즉 니느웨 성의 이야기는 지금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고, 따라서 니느웨 성의 멸망 이야기는 이 세상의 멸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이 심판을 예고 받는다면 유다는 심판에서 자유로울까요? 아닙니다. 유다 역시 니느웨의 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도 거짓과 포악과 탈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합니다. 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은 죄에 대해 심판으로 갚으시지만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영광을 회복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별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별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모릅니다. 때문에 인생을 편하게 사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힘들고 고통이 있으면 복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믿는 것도 헛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것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유다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본명 앗수르가 복이 있는 쪽에 해당됩니다. 반대로 유다는 하나님에게 외면 받고 버림받은 존재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시각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화 있을진저’에 해당된 피의 성으로 바라본다면 다릅니다. 세상이 피의 성에 해당된다면 피의 성이 힘이 있든, 부강해 졌든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화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 안에서 세상은 자랑할 것이 사라집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죄인된 자를 건져내는 그 능력 밖에 없습니다. 그 능력이 주께 있기 때문에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이 사도의 고백이었습니다.

 

 

편한 인생은 누구나 원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편한 인생을 살면 안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편한 인생을 복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니느웨가 심판을 받을 때, 그래서 철저하게 무너져 갈 때, 과연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자가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고, 피의 성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면 편한 인생이나, 세상 것을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2절부터의 내용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니느웨 성에 선지자가 말한 그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니느웨를 평안한 성으로 여길 수 있습니까? 비록 그 당시는 평안하고 부를 부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평안이 아니고 저주일 뿐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돈만 있으면 멋들어지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입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오직 돈이 최고일 것입니다. 돈이 곧 복이고 인생 또한 돈이 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하나님이 심판을 선언하셨다면, 현재의 평안은 참된 것이 아니고 진정한 현실도 아닙니다. 진정한 현실은 참담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곧 세상이 안고 있는 운명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5,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되었던 모든 것이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될 때가 이를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갈 6: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합니다.

 

 

육체로부터 거두어지는 것이 썩어질 것이라면 육체의 열매는 분명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오히려 썩어질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하시고 다스리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움이 되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낮아짐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가난함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육체의 열매를 자랑하고 그것을 힘으로 여기는 것이 부끄러움인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니느웨에 경고된 멸망의 모습을 보십시오. 앗수르가 자랑하고 믿었던 힘은 다 무너집니다. 존귀한 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이 그들에게 예고된 참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누가 관심을 두었을까요? 지금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결국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세상을 주도하시고 이끌어 가심을 믿기에 세상의 결국을 마음에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으며 세상의 현실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말씀대로 이루어질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전부가 됩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도 보이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고 방주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신자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이것이 감사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자 된 것보다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나는 복있는 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얻고 누리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잠시 눈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그와 같습니다. 이 같은 인생의 이치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고정시켜 놓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