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010.11.28 18:56

(1강) 하박국의 호소

조회 수 448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합 1:1-11http://onlycross.net/videos/hab/hab-01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설교>

 

하박국 성경은 하나님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호소로 시작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나훔과 같은 시기에 활동을 한 사람으로써, 유다가 앗수르에 의해서 고통을 당했을 때입니다. 그러한 현실이 하박국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선지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고, 반면이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심판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겁탈과 강포를 당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그냥 두고만 보십니다. 심지어 선지자가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십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선지자는 ‘하나님이 왜?’라는 부당함을 가지고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심판하심으로써 세상에 의를 세우는 분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불의로 가득한대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율법이 해이해지고,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하박국의 호소를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박국 선지자 때와 마찬가지로 불의가 가득합니다. 겁탈과 강포로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불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나서시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자가 고통을 받기도 하고, 불의한 자가 편안함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보면 도무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이러한 현실이 신자를 답답하게 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계시긴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살아계시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호소처럼 불의함에 대해서는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신자를 핍박하는 악한 자에 대해서도 심판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형통을 누리고 이방인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현실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의 호소에 응답하시는 내용을 보면 우리를 더 절망하게 합니다. 6-8절을 보면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앗수르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유다에게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일으켜서 그들을 더 큰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선지자의 호소에 대해 ‘고통에서 건져 주시겠다’고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보다 더 심한 고통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맹목적인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복 받을 때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처럼 막연한 희망을 갖도록 부추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누구든 이 같은 말로 교인을 위로하고자 한다면 그는 사기꾼일 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의 중심에 유다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데 왜 고통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만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의 중심에 나 자신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일하셔야 하고 세상의 모든 일도 나를 돕고 복이 되는 방향으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육신입니다. 복과 형통이라는 말도 육신을 근거해서 이해합니다. 육신이 잘되는 것이 복이고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도 우리 육신이 그처럼 가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육신은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무엇으로 포장을 해도 그것은 껍데기를 가리는 것일 뿐, 결국 흙일뿐입니다. 복과 형통을 누려도 결국 흙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이 원한대로 일하신다면 어떤 결과가 예상될까요? 불의와 악함에 대해서는 즉시 심판하시고, 신자는 복과 형통을 누리게 하신다면 세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신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자기 기쁨을 위해 삽니다. 이것은 분명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시고 그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겠다고 한다면 자신이 아닌 하나님 추구하는 참된 신앙은 구분되지 않게 됩니다.

 

 

신앙은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구분되게 됩니다. 고통이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모두 신앙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고통이 있게 하시고, 고통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고 의지하도록 하심으로써 신앙과 신앙 아닌 것을 드러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계속되는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나를 돕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함께 하시며 돕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잘됨이고 형통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진정한 형통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형통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불안이 해소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날마다 우리를 돕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신이 아닌 영혼을 구원을 바라보도록 도우시고, 영혼의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안다면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다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 하박국 (5강) 주의 일과 부흥 신윤식 2010.12.26 4479
4 하박국 (4강) 화 있을진저 신윤식 2010.12.19 4615
3 하박국 (3강) 믿음으로 살리라 신윤식 2010.12.12 4419
2 하박국 (2강) 옳으니이까 신윤식 2010.12.05 4235
» 하박국 (1강) 하박국의 호소 신윤식 2010.11.28 4480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