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011.01.02 21:06

(1강) 진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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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1:1-18http://onlycross.net/videos/zep/zep-0101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설교>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시각보다는 까마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 그것도 지금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한 얘기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약, 특히 선지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심판에 대한 경고 또한 지금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우리 현실 안으로 끌어 들이지를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신자로서 행해야 할 도덕적 실천을 가르치는 내용과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에 대한 관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바냐도 다르지 않습니다. 스바냐를 아무리 읽어봐도 우리의 관심을 끌거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내용들이 없습니다. 스바냐만이 아니라 선지서의 거의 모든 내용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 본문으로 삼지 않으면 개인적으로는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당시 유다를 향한 설교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를 향한 설교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선지자의 설교는 현실감 있는 내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말한 내용들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잘난 사람 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하게 편안한 삶을 살다가 천국 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선지가 강하게 외치고 있는 진멸, 심판에 대한 내용들이 관심거리로 다가온다는 것은 사실 기대하기 힘든 반응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의 외침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뜻이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와는 상관없이 선지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이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고 외칩니다.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긍할 수 있습니까? 용서의 하나님이 어떻게 땅위의 모든 것을 진멸하실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용하는 수준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저주와 진노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용서로 인한 기쁨과 감사는 자신을 저주와 진노의 자식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본질이 저주와 진노의 자식임을 아는 신자에게 심판에 대한 말씀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현실성이 없는 내용으로 치부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죄 가운데 끌려가는 자기 현실을 보게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실감하게 하는 복된 말씀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열매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위의 모든 것을 진멸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실 정도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면서 하늘의 별에게 경배하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멸절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날’을 예비해 놓으셨고 그 날은 가까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여호와의 날이 있고 그 날은 반드시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나의 날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루하루가 나에게 이롭고 이익이 되는 날이 되어지기만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재수가 좋고 행운이 따르는 매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관심 밖입니다. 12절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리지 아니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한마디로 자기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유다의 형편이었습니다. 유다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방인의 옷을 입은 것으로 표현 합니다.

 

 

이방인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에 함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백성들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들 마음에 여호와는 없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제사를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방인처럼 우상을 바라보면서 자기 인생에 행운이 따라주기를 기대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의 현장에 집어넣고 바라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와 상관이 없고 진멸의 대상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주소를 생각한다면 진멸의 대상은 유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포함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 존재로 여긴다면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음을 뜻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도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바라본다는 것이고,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운이 없어서 당하는 우연한 일로 치부한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것이 신자일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신자라고 하면서도 전혀 신자가 아닌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복과 화를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됩니다. 과연 내가 복의 길을 가는 것인지 아니면 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 살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기보다는 모든 것을 나에게 달린 문제로 여깁니다. 복도 화도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멸절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라고 말합니다.

 

 

15,16절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그 날은 분노의 날이고 환난과 고통과 황폐와 패망의 날입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빠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날이 되면 세상은 끝나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날, 세상의 끝에 서서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우리를 건지지 못함을 알 것입니다(18절).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자의 희망과 힘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멸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