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011.01.09 21:02

(2강) 수치를 모르는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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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2:1-3http://onlycross.net/videos/zep/zep-02010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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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본문>

나님께서 창조하신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세상을 멸절하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멸절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절의 이유가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된다면 ‘나 역시 멸망을 받아야 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멸망을 받는 것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했기 때문이고,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1:4-6).

 

 

유다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사 제도는 성실히 실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제사 드리는 날이 되면 성전에 모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모이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다가 하나님 앞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부지런히 모였으되 하나님은 그 모임을 부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가 자기의 수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써 행하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 규례는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은혜가 담겨 있고, 그것은 흠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행하는 제사는 단지 종교 의식일 뿐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종교 의식 자체를 믿음으로 간주합니다. 유다가 제사라는 종교 의식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결국 종교 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예배당에 모이고,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는 현대 교회나 멸망을 받은 유다가 같은 수준에 있다면 현대 교회 역시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아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때 수치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이고,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의 모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임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자신의 속이 아니라 겉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불의하고 더럽고 악하다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불의하고 더러운 존재로 표현을 하면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을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표면적인 것은 얼마든지 감추거나 위장할 수 있지만 속마음은 위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속입니다. 만약 자신의 속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할 자격조차 없음을 압니다. 오직 수치를 덮어주시는 은혜만을 구할 뿐입니다.

 

 

2절을 보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은 생명과 연관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절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면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겸손을 구하라는 말은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 실상은 겸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겸손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교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모른다면 아무리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겸손한 척해도 교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겸손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은 의롭지 못하고 교만한 존재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은 자신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현대 교인들이 여호와를 찾으면서 공의와 겸손을 구할까요?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 세상에서 높임 받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고 구할 뿐이지 공의와 겸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은 자기 수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자기 수치를 안다면 수치를 덮을 수 있는 것이 돈도 권력도 아님을 알 것입니다.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탄다고 해서 수치가 가려지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수치가 가려지고, 자신의 교만을 알기 때문에 겸손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분노의 날에 숨기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드러내는 것은 수치라는 것을 아십니까? 말씀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수치가 발각되고 드러남을 실감하십니까?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으로도 수치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가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되어 굳게 감추어질 뿐입니다. 돈과 권력 또한 수치스러운 인간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가 보지 못하던 수치를 보게 하면서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교만한 자로 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멸망에 해당되는 우리의 실제를 보게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은혜입니다.

 

 

롬 1:29-32절을 읽어 보십시오. 왜 자신을 수치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아실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앎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덮어주시고 가려주신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신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