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011.01.16 19:51

(3강) 이방나라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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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2:4-15http://onlycross.net/videos/zep/zep-0204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그론은 뽑히리라

5 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6 해변은 풀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7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

8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10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이라

11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12 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13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14 각종 짐승이 그 가운데에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

 

 

 

<설교>

 

원을 단지 ‘천국 간 다’는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자리에서 어디로 옮김 받았는가?’라는 시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던 본래 자리를 생각을 해야 그 자리에서 건짐 받은 은혜가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구원의 은혜가 참으로 존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본질인 죄 문제로부터 출발을 해야 구원의 가치가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문제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에만 몰두합니다. 자기 구원만 확보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선지자가 이방 나라의 심판에 대해 경고합니다. 심판의 이유는 유다와 똑같이 죄에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이 세상 전부를 하나님의 심판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누구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심판에서 건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심판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이 같은 구원의 원리를 모르는 신자가 없겠지만 문제는 현대 교인들이 죄문제를 이미 예수로 인해 해결된 것으로 여기면서 더 이상 죄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더 이상 죄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면서 쉴 새 없이 죄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전혀 살지 않은 빈집이라고 해도 먼지가 수북히 쌓이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안은 죄로 가득 쌓여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 같은 죄의 현실을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유로 묵인하거나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이용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존귀함은 죄로 인해서 절망감을 느낄 때 선명하고도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 용서로 인한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구원 확보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은 죄를 보기보다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종교적 행보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심판에 갇힌 우리를 건지는 능력으로 발휘됩니다.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용서의 은혜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단지 내 구원을 챙기겠다는 욕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심판에 대한 선지자의 외침을 들으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 자리는 심판이지 구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수치스런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부끄러운 일이고 수치스러운 죄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지 못합니다. 그것이 수치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압과 암몬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약한 유다를 조롱하고 비방했습니다. 그것은 유다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약자를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수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에 의해서 자기 수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치를 보는 신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임을 알기에 구원에 대해서 자신의 의는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고 오직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긍휼만을 드러내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니느웨 성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심판이 임하기 전 이 성은 아무 염려 없이 부요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쁜 성이라고 일컬을 만큼 행복한 성이었습니다. 이들은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염려 없이 부요를 누리면서 ‘내가 제일이다’는 사고방식에 묻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관심 없이 나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도 심판이 임함으로써 부요와 기쁨은 종말을 고하고 비웃음과 조롱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세상은 벗어날 수 없는 이 운명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일에 무지한 세상은 오직 자기를 위해 살아갈 뿐이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 인생을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악이며 수치라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현실이 보인다면 그것은 세상 밖에 나와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참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서 세상의 현실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성공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세상 밖으로 끌려 나왔다는 것을 성공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믿음 자체가 곧 복이며 기쁨으로 자리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헛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실까?’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질 인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교만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믿음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서 이러한 믿음의 열매가 매어집니까?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늘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수치를 여전히 가려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 안에 부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항상 감사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보답 하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수준의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존귀한 구원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저주이고 심판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선지자의 말을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선지자의 외침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이 꿈틀댑니다. ‘나도 구원 받을만한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의 세력까지 다스리시면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심판과 저주에 속한 비참한 자기 본질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에서 건져주신 끝없는 긍휼과 사랑에 굴복하게 합니다. 이러한 굴복의 현장에서 나올 것은 용서와 긍휼로 인한 감사뿐입니다.